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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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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 박 뉴스” 나는 1959년에 태어났다. 태어난 다음 해에 4.19 혁명이 있었고, 그 다음해에 5.16 군사쿠데타가 이어졌지만 그 시절 나는 아직 강보에서 어머니의 젖을 보채고 있었다. 내 유년은 군부정권의 초창기와 함께 이어졌다. 매 시 정각마다 라디오에서 시보가 울리면 까랑까랑한 톤으로 “박정희 대통령은...”이란 멘트로 시작되는 뉴스가 진행 되었다. 함께 뉴스를 듣던 무학(無學)의 외할머니나 어린 소년은 대통령과 박정희가 동의어(同義語) 인줄 알 정도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박정희=대통령’은 절대불변의 등식이었다. 5.16쿠데타와 함께 시작된 ‘땡 박 뉴스’는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한 1979년까지 무려 18년간 계속되었다. 박정희 재임 18년은 내 유소년기 모두를 잠식하였다. 거대한 반공 교육장 당시 초등학교에 입학한 새내기들이 옷자락에 손수건을 매달고 처음 배우는 공동체 생활은 “앞으로 나란히”란 구호에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줄을 서는 것 이었다. ‘앞으로 나란히’로 시작된 줄서기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좌우로 정렬’이란 구호로 발전하였는데 ‘좌우로정렬’은 나중에 알고보니 군사용어였다. 당시에는 학년초에 교사들이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파악하기 위한 ‘가정방문’이란 행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는데 가정을 방문한 교사에게 많은 학부모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매로 다스려 주세요.” 학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를 ‘매로 다스려달라’는 것은 교육적 의미를 가진 ‘사랑의 매’일 터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린 초등학생에게도 몽둥이로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구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고, 심지어 4학년 때 담임이셨던 선생님은 아이의 무릎 사이에 각목을 넣고 꿇어앉힌 채 각목을 비틀거나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우고 그 두 손가락을 누르는 등 체벌이라기보다는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이런 폭력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는 거의 없었다. 1968년 1.21 사태와 이승복 사건 같은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어린 우리들에게 ‘괴뢰군’이라 불리는 북한군에 대한 증오심과 공포심 그리고 두려움을 함께 주었다. 우리에게 인식된 공산당은 사람이 아닌 ‘악마’ 그 자체였다.‘무장공비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이유로 아이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충격적인 보도는 공산당은 사람이 아닌 ‘악마’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 했으며, 청와대를 기습한 124 군부대 등 북한의 특수부대의 공작원들에 대해 ‘하룻 밤에 수백리를 이동하고, 며칠간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도 엄청난 전투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등의 말들이 떠돌았다. 그들이 사람의 한계를 벗어난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미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산당에 대한 무한한 공포심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담이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발언하여 입을 찢어 죽였다는 당시 조선일보 보도는 기자가 현장을 방문하지 않고 쓴 추측기사라는 시비로 이어졌고, 법원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형사심에서는 조선일보의 승로를 판결한 반면, 민사 소송에서는 피고인 승소를 판결함으로서 사실상 조선일보의 기사가 추측 기사인지 현장을 취재한 사실보도인지 여부를 여전히 판단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당시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병영이었다. 1968년 12월 5일 박정권은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였고 어린 우리는 그 뜻을 알기도 어려운 헌장 전문을 신조처럼 암기해야만 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되는 이 헌장은 커다란 액자에 담겨 모든 공공기관에 진열되었으며, 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출판물의 첫장에 게제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해 혼 분식을 장려했는데 그 방법이 아주 고압적이었다. 선생님들은 거의 매일 도시락 검사를 하였는데 밥에 보리쌀이 30% 이상이 섞여있지 않으면 큰 범법자라도 되는 듯 심한 질책을 받아야 했고, 음식점에서 판매하는 밥에 보리쌀이 일정부분 섞여있지 않으면 그 음식점은 영업정지 처분을 받아야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쌀이 부족하여 쌀밥이 먹고 싶어도 쌀밥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도시락은 보리쌀이 30%가 아니라 70%이상을 차지하는 도시락을 싸왔고 극히 일부 부자 집 아이들만 도시락 아래 부분은 쌀밥을 깔고 위에 살짝 보리밥을 덮는 식으로 검사를 피해가기도 했다. 이런 우스꽝스럽고 타율적인 정부의 사생활 간섭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남자의 머리가 귀를 덮어도 (경)범죄자였고, 여자는 스커트가 무릎 위로 10 센티미터만 올라가도 범죄자 취급을 받아 전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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