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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8 19:54 수정 : 2007.05.28 20:26

광희동 러시아·몽골거리 전경. ⓒ 한겨레 블로그 김외현

지하철 동대문운동장역 2번출구로 나와 왼쪽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러시아·몽골거리가 나온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시 중구 광희1동이다. 정식으로 러시아·몽골거리라는 명칭이 붙은 것도 아니고, 별도의 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 알파벳 가득한 거리

다만 건물마다 내걸린 간판에 잘 읽을 수 없는 글자들(러시아 알파벳)이 섞여 있어 이곳이 평범하진 않구나 싶다.

입구에서 200미터쯤 들어가 오른쪽을 돌아보면 입이 쩍 벌어지는 건물이 하나 있다. 금호오피스텔이라는 10층짜리 건물인데 입주한 업체를 안내하는 표지판에 러시아 알파벳이 가득하다. 이른바 '몽골타운'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에서 한글은 오히려 외국어 같다.

몽골타운의 사무실 안내표지판. ⓒ 한겨레 블로그 김외현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기다란 털모자를 쓰고 치렁치렁 롱코트를 입고서 돌아다니는 콧수염 아저씨들도 있고, 회색 빵모자를 살짝 눌러쓴 정장의 옷차림으로 기다란 팔과 다리를 휘젓고 걷는 벽안의 백인 젊은이도 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모델 같은 옷맵시를 자랑하는 백인 여성들은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만하다.

이국인들의 활보 가운데,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 가까이 가서 귀를 세워보면 그들도 한국인은 아니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이들은 바로 몽골 사람들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서울 시내 한 복판에 러시아·몽골거리라니….


원래는 ‘인쇄공장 밀집지역’

공식적으로 정리가 된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이 지역의 역사를 정리면 다음과 같다.

을지로6가 인쇄업소 밀집지역. ⓒ 한겨레 블로그 김외현

동대문운동장과 시장을 끼고 있기는 하지만, 원래 을지로6가는 비닐공장, 인쇄공장 밀집지역이다. 아직도 골목으로 깊이 들어가면 매캐한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입구인 광희동거리에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캬바레, 스탠드바, 나이트클럽 같은 유흥업소가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여관, 모텔 등 소형 숙박업소들이 영업을 했다.

그런데 1990년 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트고, 그 무렵 크렘린광장에서 불었던 변화의 바람(Wind of Changes)이 광활한 시베리아벌판을 건너 머나먼 한반도의 동대문시장까지 불어왔다. 러시아 오퍼상, 즉 보따리장수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러시아 상인들의 ‘원스톱’ 근거지…구매에서 탁송, 숙식까지

동대문시장을 찾은 러시아 상인들은 가까운 광희동의 여관과 모텔에서 묵었다. 숙소를 거점으로 주변에는 '카고(cargo)'라고 부르는 탁송사무소가 들어섰다. 결국 당시 러시아상인들은 동대문에서 물건을 사서, 광희동 음식점에서 술과 식사를 해결하고, 광희동 여관에서 숙박을 해결한 셈이다.

이 무렵 러시아식당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큰 길의 점포는 권리금이 비싸서 엄두를 못 냈지만 골목 안쪽으로는 러시아알파벳이 간간이 눈에 띄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었다. 지금 남은 곳은 <마이 프렌드(MY FRIEND)>가 거의 유일하다. 유럽 영화에서나 볼 듯한 원색 벽바탕과 카펫에 하얀 레이스의 커튼과 테이블보가 매우 인상적이다.

IMF 구제금융 시기, 이 지역은 최고의 호황을 자랑했다. 낮은 환율을 기회로 러시아 보따리상이 급증했고, 더불어 러시아 윤락녀 유입도 극에 달했다. 이 지역이 러시아 사람들의 근거지가 되다 보니, 서울로 온 러시아 윤락녀가 처음에 숙소를 잡는 곳은 동대문이었다. 당시 러시아 통역의 수요가 증가하다보니 사할린 등지에서 온 고려인들도 한 몫 잡았다.

고향마을이라는 뜻의 식당 크라이로드노이. 주중엔 한국인 단골손님들, 주말엔 러시아 사람들이 찾는다. 주인인 고려인 김와리사씨는 5년전 처음 개점했을 때를 떠올리며 “그 때는 그래도 장사가 잘 됐지만 지금은 주변에 식당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 한겨레 블로그 김외현

중앙아시아와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의 등장

물건 따러 왔다가 일 끝나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는 러시아상인들이 ‘뜨내기 손님’이었다면, 한국에 있으면서 꾸준히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와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옛 소련 지역인 중앙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러시아어를 쓸 수 있는 광희동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몽골 역시 학교에서 배우는 제1외국어가 오랜 기간동안 러시아어였다. 게다가 현대 몽골어 표기는 러시아 알파벳을 차용한다.

이렇듯 언어적 공통성을 기반으로 중앙아시아와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들은 이 지역에서 식당과 상점을 운영하기도 하는 ‘주인’으로 변모한다. 중앙아시아 출신 사장이 운영하는 양고기집과 건물가득 몽골인들의 점포가 들어선 몽골타운 건물의 풍경은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라 해도 약국, 편의점, 노래방, 미용실 등 생활 편의적인 재화와 용역을 판매하는 곳이라면, 한글과 러시아어를 병기했다. 또 반대로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몽골의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이라 해도, 이국적인 음식을 찾아온 한국 손님들을 위해 한글과 러시아어를 병기했다.

지금은 몽골인이 지배적

과거 호황이었던 러시아 식당과 업소들이 이제 대부분 몽골인 운영업소로 변했다. 몽골 사람들은 한국 다양한 곳에서 저마다 힘든 육체노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고,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모임을 가지고 술 마시고 논다.

중부경찰서 관할지역인 이곳은, 외국인 범죄 가운데 몽골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다. ⓒ 한겨레 블로그 김외현

몽골인의 집단거주만 놓고 보면, 서울이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몽골인이 사는 곳이라는 말도 있다. 서울에 몽골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유목이 아직 많은 인민들의 생계를 차지하는 몽골에는 사람들이 모여살지 않는 벌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말마다 몽골인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통에, 싸움질도 잦다. 관할 중부경찰서에는 주말마다 몽골인 폭행사건 피의자와 피해자들이 줄을 잇는데다, 외국인 범죄 가운데 몽골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기도 하다.

몽골인이 지배적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광희동에는 러시아 사람들과 중앙아시아 사람들들도 찾아온다. 그들을 위해 마련된 카페와 식당과 수퍼마켓으로 향하는 발길은 끊이질 않는다.

‘공주’라는 뜻의 카페 <만도화이> 주인 오리가말시시그씨는 몽골에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엄마다. 아이들 아빠는 고양의 욕조공장에서 일한다. 아이들 보러 종종 몽골을 오가며 3년째 한국생활을 해온 그녀는, “<만도화이>에서 몽골인들이 피로도 풀고, 한국말도 배우고, 일자리도 소개하고, 사람도 많이 사귀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 한겨레 블로그 김외현

태극기도 십자가도 없는 구역

광희1동 러시아·몽골거리는 하나의 블록으로 한정된다. 북쪽으로는 을지로6가 치안센터와 국립의료원, 남쪽으로는 광희1동 동사무소, 동쪽에는 큰 길, 큰 길 건너는 라모도시장(스포츠용품), 서쪽에는 우체국과 전화국 등이 '태극기를 펄럭이며' 이 블록을 둘러싸고 있다. 이곳에는 교회도 없다. 한국의 밤 풍경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빨간 십자가마저 이곳을 침범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태극기도 십자가도 꽂히지 않은 땅, 광희동의 풍경. 상징적이나마 비기독교 외국인들과의 자생적인 화합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오히려 '태극기를 펄럭이는' 기관들이 그 범위 밖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두고 있는 현장인 것일까.

몽골타운 7층 벽에 걸려있는 구인·구직 안내판. ⓒ 한겨레 블로그 김외현

광희동은 워낙에 외국인이 자주 오가는 곳이라, 불법체류이민자 단속 때마다 집중단속지역이 되곤 한다. 과거 방문객 수가 많았던 시절에는 경찰이 숫제 길목 어귀에 버스를 대놓고 '잡아다 싣기'를 반복했다 한다.

그래서일까. 최근 주말에는 광희동을 벗어나 축구장 인근의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단속을 피해서란다. 기분이 씁쓸하다. 그들의 새로운 '구역'에 한반도 단일민족의 상징처럼 태극기를 꽂으려 하다가, 그만 광희동 안에 있어도 될 사람들을 못내 튕겨낸 것은 아니었을까.

여전히 삶은 계속된다, 장사도 계속되고…

며칠만에 아침에 다시 갔더니 우즈벡 요리 식당 <사마르칸트> 사장 쇼루 토히로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승합차량이 고장나서 시동이 걸리지 않아 1시간 째 쩔쩔 매고 있다고 했다. 점심시간에 식당을 열기 위해서는 시간이 빠듯하다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자동차수리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와 만난 곳은 그의 집 앞이었다. 그는 가게에서 걸어서 3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거리의 한 벽돌집에서 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현관에는 만삭인 그의 아내가 나와있었고, 조카들의 주말 아침 재롱으로 시끌벅적한 대가족의 분위기가 담 너머로 전해졌다.

여전히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글은 지난 1월의 취재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우즈벡 요리 식당 <사마르칸트>. 여전히 삶은 계속된다. ⓒ 한겨레 블로그 김외현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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