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사회주의자
스스로를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로 불렀던 스콧 니어링. 그는 1883년 미국의 탄광도시 모리스런의 부유한 가정에서 여섯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생활방식은 청교도적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청년기에 펜실베니아 대학에 입학하고 이후 같은 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된다. 점차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는 니어링은, ‘자본주의는 전쟁을 먹고 산다’는 사실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열심히 반전운동을 전개한다. 두각을 나타내는 좌파 지식인이 된 니어링을 미국 정부는 가만두지 않았다. 니어링은 1917년에 발표한 반전 논문 때문에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1919년에 연방법정에 피고로 서게 된다(그러나 배심원들의 30시간에 걸친 긴 숙의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니어링은 직장에서 해고되며 신문 기고가 거절당하고 강연 요청도 끊기는 등의 탄압을 받아 사회적으로 고립되었고 가족(부인에게 별거를 당하고 아이들로부터도 멀어짐)과도 헤어진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의 정당성을 확신했던 니어링은 1917년에 사회당에 가입했고 1918년에는 현직의원이었던 피오렐로 라 가르디아에 맞서는 후보로 선거에도 출마했다. 이후 사회당이 트로츠키주의로 기울면서 소련을 비난하자 ‘미국 사회당이 소련의 반대자요, 방해자라는 반혁명적 역할을 하는데 항의’하는 뜻으로 1922년 사회당을 탈당하고 1927년에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공산당은 파벌싸움이 심했고, 소련의 지배와 간섭을 받고 있었다. 소련의 압력을 받은 공산당이 자신의 저서 <제국의 황혼> 출판을 금지하자 니어링은 1930년 공산당을 탈당한다. 중년기(개인의 ‘심리적 문제’가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기)를 맞이해, 좌우 정치세력 모두로부터 고립된 니어링은 자급농이 되어 은둔하면서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끝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스콧 니어링은 1983년, 100세 되던 해 사망했다. 스콧 니어링은 처음에는 혈기왕성한 좌파 지식인일 뿐이었으나, 점차 미국 땅에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혁명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그는 중년기라는 인생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좌우익 모두로부터 배척당함으로써 은둔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나는 마흔다섯 살이 되었을 때 ··· 모든 조직의 실무에서 손을 떼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나는 정치지도권, 특히 좌파의 정치지도권이 더 젊은 사람들에게 넘겨져야 한다는 이유에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단념했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289쪽) 왜 스콧 니어링은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은둔하게 되었는가? 무엇의 그의 날개를 꺾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니어링의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한다. 니어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였다. 건축기술자였던 니어링의 할아버지는 모리스런 마을의 탄광 및 벌목 사업의 감독자로써 그 마을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왕’이었다. 당시 친노동자 계열의 지역신문 <윌리엄스포트 그리트>라는 주간지는 니어링의 할아버지를 ‘모리스런의 차르(황제) 니어링’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니어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83년 내가 태어났을 때 모리스런의 모든 것은 완전히 할아버지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 모리스런은 주민들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군림하는 몇 명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점에서 소수 독재정치의 축소판이었다. ··· 내 할아버지는 ··· 독재정치의 특성과 힘을 그대로 대변했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70/167쪽) 니어링의 할아버지는 독학(학교는 2년밖에 못 다님)으로 자수성가를 한 인물이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고생을 해봤기에 타인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타인 특히 약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데 인색한 사람도 있다. 니어링의 할아버지는 ‘죽어라고 노력하면 다 나처럼 될 수 있어. 너희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서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타인(약자)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노동자들이 본사에 대표를 보내 니어링의 할아버지를 현장감독직에서 해고하라고 요구했다. 회사 대표인 제너럴 조지 마기가 할아버지에게 급전을 보냈다. “파업위원회가 이곳에 와서 당신을 쫓아내라고 요구하고 있소. 이 자들에게 뭐라고 하는 게 좋겠소?” 할아버지는 바로 답신을 보냈다. “전원 해고라고 말하십시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68쪽) 그 노동자들은 모두 해고되었다. 이렇게 니어링의 할아버지에게 저항하면 ‘직장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집 없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정치적으로 볼 때 보수우익이었던 니어링의 할아버지는 어린 스콧 니어링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먼저 긍정적인 영향부터 살펴보자. 니어링의 할아버지는 적어도 사기와 협잡을 통해 출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계급적 입장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으나, 자기 접시에 담은 음식은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하는 등의 규율을 세워 일상생활을 질서 있고 알뜰하게 꾸려나갔다. 또한 나름대로 주변의 대인관계에서는 ‘공정’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니어링의 할아버지는 돈 자랑에 집착하는 졸부는 아니었으며 ‘완고하지만 나름대로는 건전한 보수주의자’였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에누리 없이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대했는데, 이는 어린 스콧 니어링의 ‘양심’과 ‘도덕성’을 강하게 발달시켰을 것이기에 어른이 된 니어링이 죽을 때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게 하는, 하나의 원인으로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못 만드는 것이 없는 기술자였던 할아버지는 어린 스콧 니어링에게 자급자족 능력(이는 나중에 니어링이 자기 집을 직접 지을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자급농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을 가르쳤고, 마을에서 제일가는 장서 보유자였던 할아버지는 스콧 니어링의 지적 능력도 크게 발달시켰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던 할아버지는 어린 니어링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다. 니어링의 집안은 따뜻한 사랑보다는 엄격한 규율과 권위가 지배하는 숨막히는 곳이었다. 부모님의 집에서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하루 일과를 준비했다. ··· 아이들을 구슬리고 달래거나 설득하는 일은 없었으며, ‘아이들이 가장 잘 안다’는 꿈같은 얘기도 그 시절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어린 시절 나는 규율이 엄격한 집안에서 자랐다. ··· 부모들은 될 수 있으면 본보기와 설득을 통해, 경우에 따라서는 체벌을 통해 규칙을 집행했다. 우리 집에 놀러온 아이들도 우리에게 적용되는 규칙을 똑같이 따라야 했다. ··· 우리 가족은 질서정연하고 조직적이며 규율이 잘 잡혀있는 사회집단이었다. ··· 우리 가족과 우리 이웃들은 자녀들에게 규칙과 질서를 지키도록 설득하고 강요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매질까지 하는 등 인간사회의 축소판이었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390/498~499쪽) 아무리 공정한 원칙에 의해 운영된다고 해도 이런 환경은 아이들의 창의성을 억누르게 되고 아이들을 화나게 한다. 니어링은 어른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어린 아이였던 것 같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반대의견을 처음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였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물론 반대의견은 인정사정없이 묵살되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있었던 일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까운 친지들을 초대해 집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대화 도중 누군가가 대니얼 웹스터라는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 그의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았다. “저는 그 사람이 형편없는 속물인 데다 술고래라고 봐요.” 비난의 말들이 나를 향해 빗발처럼 쏟아졌다. 사람들 앞에서 내 나름의 이견을 입 밖으로 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 순간 사회적 비난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느꼈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47쪽) 건전한 어른들이라면 반대의견을 말한 니어링에게 이렇게 물었어야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라고. 그러나 니어링의 권위적인 집안분위기는 반대의견이나 다른 생각을 수용하고 포용하는데 결코 너그럽지 않았던 것 같다. 이때의 사건으로 아마도 니어링은 대인관계에 대한 자신감이 손상되고 어른들에게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어린 스콧 니어링은 동네 아이들(특히 가난한 아이들)과 자유롭게 어울리지 못한 채 홀로 자라게 된다. 니어링의 할아버지가 약자를 배려하는데 인색한 사람이었고 마을 주민의 대다수가 할아버지와 사이가 나빴던 노동자였기에 니어링의 집안은 아이들을 마을 아이들과 격리시켰던 것 같다. 그 결과 스콧 니어링은 13살 이전까지는 거의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가정에서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다. 어른들의 문제로 인해 외톨이로 지내야만 했던 스콧 니어링은 얼마나 슬프고 화가 났을까? 어릴 때 내게는 이 울타리를 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이웃집 아이들은 그 목장에서 크리켓 놀이를 했다. 나는 얼마나 울타리를 넘어가 아이들 놀이에 끼고 싶었는지 모른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49쪽) 니어링 집안의 어른들이 또래 아이들, 특히 가난한 아이들과의 접촉을 차단한 것은 스콧 니어링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미쳤다. 우선 어린 니어링은 ‘정서적 소통능력’이나 ‘공감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차단당했는데, 이것이 훗날 니어링이 대인관계를 정상적으로 풀지 못하게 만든 주요원인이다(감정능력의 미개발은 사고형(T)인 스콧 니어링에게는 특히 치명적이다. 이는 뒤에 성격 부분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또한 민중,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어른들의 냉정하고 싸늘한 시선은 어린 니어링으로 하여금 ‘민중에 대한 사랑’을 정상적으로 개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여, 어린 체 게바라가 가난한 인디오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하며 그 아이들을 집에 자유롭게 데리고 와 먹을 것을 주고 재워주게 했던 게바라의 부모들과 비교해보라! 이런 점에서 온 몸으로 민중에 대한 사랑을 키워온 체 게바라가 최후까지 혁명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반면, 민중에 대한 사랑보다는 단지 그것이 ‘진리’이고 ‘정의’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운동을 했던 스콧 니어링이 끝내 민중과 결합되지 못하고 은둔한 채 삶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 부모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니어링 집안의 어른들은 또한 청년기까지 스콧 니어링의 정치의식을 매우 보수적이고 낙후한 상태로 묶어두었다. 스콧 니어링의 부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니어링에게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라고 말했고 실제로 니어링도 그것을 희망할 정도였다. 어쨌든 니어링은 집안 어른들 덕분에 고등학교 1학년 때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숭배할 정도로 낙후된 정치의식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청년기 이후 자기가 사회문제에 관해 너무나도 무지하고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처절하게 깨달았을 때, 스콧 니어링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린 니어링은 어른들 특히 할아버지에 대해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를 두 가지만 살펴보자. 어린 시절 니어링의 여동생 ‘베아’는 할아버지에게 쓴 편지에 말 한 마리가 죽고, 집이 불타 없어졌다는 등 여러 재난에 대한 것들을 꾸며서 썼다. 니어링 또한 비슷한 행동을 했다. 어머니의 일기를 보니, 내가 네 살 때 어머니한테 불이 난 걸 보았다고 얘기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무지하게 큰 불이 나서 제재소 열네 개랑 제재소 두 개랑 제재소 열한 개랑 집 열네 채랑 집 열한 채가 몽땅 타버렸는데, 불이 계속 활활 타오르면서 무지무지 빨리 번졌어요.”(<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51쪽) 그것이 꿈이든 상상이든 ‘불’이나 ‘재난’은 흔히 ‘화’나 ‘분노’, ‘불안’과 관련된다. 따라서 어린 니어링과 그 동생이 보여준 모습은 그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매우 화가 많이 나있었고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니어링은 육사에 진학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부모님의 오랜 희망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한 방에 꺾어버렸다. 육사에 진학해 군인의 길을 걸었으면 하는 부모님들의 기대는 어느 해 겨울 얼음처럼 단단한 눈덩이에 눈을 맞는 사건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아무리 군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 해도 한쪽 눈만 가지고는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군인이 되는 신세를 면했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97쪽) 이 사건은 단지 우연적인 사고로 치부하기에는 그 상징적인 의미가 너무 크다. 이것은 아마도 스콧 니어링의 부모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항’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면 스콧 니어링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숨막히는 집안 어른들 틈에서 어머니의 품은 따뜻한 피난처의 역할을 해주었을까? 어머니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신체적 건강이었다. ··· 어머니는 무작정 이웃사람들이 하는 대로 틀에 박힌 식사 대신 과일과 신선한 야채로 이루어진 독특한 식단을 고집하셨다. ··· 어머니는 균형 잡힌 식사가 건강을 보장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믿었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56~57쪽) 니어링의 어머니는 자의식이 뚜렷한 여성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의 건강법은 후에 니어링의 자급농생활과 채식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복한 남자들을 만나 결혼한 누이동생 셋을 돈 버는 재주가 없었던 남자 삼 형제와 비교해 ‘부티 나는 세 자매’로 부르곤 했다는 사실이나, 손녀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를 보면 니어링의 어머니 또한 그리 따뜻하거나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우리 가족이라도 네 부모세대에게는 선물을 보내지 않는단다. 네 부모세대는 나보다 가진 게 훨씬 많고, 그들에게 필요치 않은 것을 선물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55쪽) 여기까지만 봐도 어린 스콧 니어링이 너무 가여워진다. 그렇지만 이왕 내친 김에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자.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할아버지는 스콧 니어링의 아버지를 있으나마나 한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니어링은 자기의 인격 형성에 큰 비중을 차지한 네 사람을 어머니, 할아버지, 사이먼 넬슨 패튼 교수(대학교 때의 스승), 레오 톨스토이(의 저작)로 꼽을 뿐 아버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농산물 가게를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도 니어링처럼 자기 아버지(니어링의 할아버지)에게 화가 많이 나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화가 많이 난 아들은 자기 아들과 잘 지내지 못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스콧 니어링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스콧은 태어날 때 눈과 입을 동시에 열더니 줄곧 그것을 닫을 줄 모르는구나”와 같은 부정적(아버지가 아들을 비난하는 것)인 것들이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넌 말이 너무 많구나” 하고 질책을 당했던 일이 생각나는데, 사실 나는 그런 질책을 당할 만한 아이였다. 내가 고등학교 토론팀 선발대회에 나가 3분 스피치 부문에서 상을 탔을 때, 아버지랑 주고받았던 얘기도 생각난다. 대회 다음날 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에 3분 스피치 해서 상금 25달러를 받았어요. 1분에 8달러를 번 셈이지요. 아버지도 1분에 8달러씩 버시나요?” “아니” 아버지는 내 건방진 질문에 무뚝뚝하게 대답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네가 1분에 8달러를 버는 건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일이다. 1분당 내 수입은 그보다는 적겠지만 나는 평생을 두고 꾸준히 수입이 생긴단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60쪽) 어린 니어링이 그리 못돼먹은 아이는 아니었을 텐데,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고 해도 아버지의 말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니어링은 이 글에서 자기를 ‘질책을 당할 만한 아이’라고 표현하며 아버지의 냉담함을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결국 아들을 비난하는 것일 뿐이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감정을 억압하거나 회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자기가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러 정황을 보건데, 매우 특이하고 불운하게도 스콧 니어링 뿐만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정서적 반응능력, 공감능력의 부족을 약점으로 가지는 사고형(T)이었던 것 같다(이는 니어링의 성격 부분에서 다시 다루겠다). 어쨌든 스콧 니어링은 합리적이고 공정하기는 하지만 매우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며 냉랭한 집에서 성장하게 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 상처는 너무 깊고 치명적이어서 니어링을, 민중과 하나가 됨으로써 그들을 불러일으키는 혁명가로 성장하지 못하게 했고, ‘지조를 지킨 선비’의 역할에만 머무르게 한 기본원인으로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 애인을 고를 때 어떤 사람을 고를까? 바른 말을 잘 하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데는 서투른 사람? 아니면 때때로 말실수를 하지만 자기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람은 민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민중은 그 사람과 함께 고난의 길로 선뜻 떠나지는 않는다. 민중은 정의로움과 현명함 이전에 진정으로 자기를 믿고 아껴주며 사랑하는 ‘선구자’를 만날 때에만, 그를 사랑하며 그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각오를 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부모가 준 악영향 때문에 스콧 니어링은 혁명가의 기본자질인 ‘민중에 대한 사랑’을 정상적으로 개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양심적이며 비범한 지식인이었던 그는 민중과의 소통, 민중과의 결합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홀로 은둔한 채 고독하게 세상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대신 냉담하기 짝이 없는 대중들을 애도하라 세상의 커다란 불안과 잘못 앞에서도 감히 입을 열어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굴종의 사슬에 묶인 겁에 질린 대중들을 애도하라 니어링을 포함해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좋아했던 랠프라는 시인의 <죽은 자를 슬퍼 말라>는 위의 시는 민중에 대한 굳은 신뢰와 사랑이 아니라 ‘민중에 대한 원망’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 그 시가 유행했다는 것은 결국 미국 진보운동의 한계와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부질없는 가정에 불과하지만, 만일 니어링이 자기 문제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제때에 고쳤다면, 그는 민중과 굳게 결합된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미국역사를 새롭게 썼을지도 모른다.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자기 부모에 대한 재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을 회피할 때에는 마음도 몸도 모두 병들게 되어 인생의 비밀도 모른 채 고통스럽게 죽어야 한다. 용기 있는 직면만이 행복한 인생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것이다.(<부모-나 관계의 비밀>, 김태형·전양숙, 새뜰심리상담소 2005, 105쪽) 스콧 니어링은 자기 할아버지와 부모를 재평가했을까? 아니면 그 문제를 회피했을까? <스콧 니어링 자서전>에 의하면 대답은 후자이다. 그는 여러 대목에서 자기 할아버지의 문제점을 슬쩍 언급하지만 결코 그것을 정면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못 한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회피는 니어링으로 하여금 할아버지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처를 자각하지도 치료하지도 못하게끔 만들었다. 그 결과 니어링의 투쟁에는 인류에 대한 사랑뿐만이 아니라 자기 할아버지나 부모에 대한 분노감정이 때때로 끼어들게 되었고, 대인관계를 미숙하게 처리하는 약점도 극복하지 못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가 아버지의 상징인 ‘사회’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채,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려 은둔하게 된 것이 본질적으로는 자기 부모(할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지나친 것일까? 세계제국주의의 두목 나라인 미국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한다는 것은 히틀러치하의 나찌독일에서 혁명운동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 진보운동이 실패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사회주의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책임질 일이지 스콧 니어링이 책임질 일은 아니다. 만일 미국혁명을 아주 뛰어난 지도자가 이끌었다면 스콧 니어링은 자기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그는 실패한 미국 좌익운동의 희생자이자, ‘라스트 모히칸’이었다. 미국의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은 전쟁의 압력에 짓눌려 몸을 굽히고, 순응하고, 그럴듯한 변명을 둘러대며, 마침내는 항복했다. 그렇다면 다음은 내 차례인가?(<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213쪽) 그러나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는 비극을 목격하면서도, 스콧 니어링은 악의 소굴 미국을 떠나지 않았고 끝까지 자기 지조를 지키다 죽었다. 보통 사람들은 꿈도 꾸기 어려운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스콧 니어링은 자기 그릇이 되는 만큼은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그릇의 틀을 깨고 나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스콧 니어링은 민중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고, 민중을 투쟁으로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부족한 자기 능력을 눈물로 개탄했다. 세상을 뒤바꾸는 혁명가를 꿈꾸었으나 ‘지조를 지킨 선비’로 만족해야만 했던 스콧 니어링. 그의 솔직한 고백은 우리의 가슴을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촉촉히 적신다. 나는 황혼에 싸인 이 나라의 법에 따르는 내 동료 시민들이 가여울 뿐 아니라, 내가 그들을 무지와 두려움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능력이 없음을 몹시도 유감으로 생각한다. ··· 예민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어째서 행복한 삶이 불가능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스콧 니어링 자서전>, 스콧 니어링, 실천문학사, 367쪽) 새뜰심리상담소출판사 대표 김태형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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