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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학원 백낙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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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영원한 청년정신…’ 낸 인제학원 백낙환 이사장
큰아버지 백인제 박사 뜻이어 80년‘인제의대’ 세계 수준으로 키우고파
“나이보다 20년 젊다” 운동도 열심 “지금이라도 초상화 속의 그분이 나를 향해 입을 여실 것 같다. ‘자네, 잘 해왔군.’ ‘고맙습니다.’ 내가 세상을 향해 나지막하게 하고 싶은 말이다.” ‘그분’이 누군가? 서울 명동성당 옆 중구 저동 백병원의 설립자 백인제 박사다. ‘나’는 큰아버지 백 박사의 뜻을 이어 백병원을 전국에 포진한 한국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키우고 인제대학을 세운 백낙환(81) 인제학원 이사장. 큰아버지는 “백인제 박사 앞에 백인제 없고, 백인제 박사 뒤에 백인제 없다는 말을 들었을 만큼 외과의로서는 조선 최고 명의였다.” 역시 의학박사로 일급 외과의인 백 이사장의 평생 포부는 제2의 백인제가 돼 병원을 일으키고 제자들을 길러 ‘인술로 세상을 구한다’(仁術濟世), ‘어짊과 덕으로 세상을 구한다’(仁德濟世)고 했던 큰아버지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바로 인제학원 건학이념이기도 하다. “나의 80 인생은 한마디로 큰아버지 백인제 박사님의 뜻을 받들어 일편단심 의사의 길, 교육자의 길을 걸으며 백병원과 인제대학교 일에 전념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가족경영, 족벌체제는 배격한다. 병원, 학교 모두 공익법인이다. 대체로 다 이루었으나 한 가지 더 남았다. “대학을 더 키워서 세계적인 수준에 올려놓고 싶다.” 아직도 다섯 개 백병원 현장에서 임상실습 나온 학생들에게 오랜 경험들을 직접 전수해주고 있다. 그들에게 당부한다. “의학이란 게 생명 다루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봉사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보람도 있다.” 이쯤에서 “후학들의 인생에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책을 냈다. 〈영원한 청년정신으로〉(한길사). 13살 나던 1939년에 고향 평북 정주 땅을 떠나 서울로 와서 휘문중학에 들어간 백 이사장은 그 다음해부터 큰아버지 댁에 신세를 졌다. 사실상 큰아버지 아들이 됐다. 그 집에서 살았고 큰아버지 뜻에 따라 경성제대 의예과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고등문관 사법·행정 양과에 모두 합격한 수재였던 아버지 백붕제는 15살 때 18살 어머니와 결혼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5개월 만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지성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민주화와 민족화해에도 앞장선 백낙청 교수는 새어머니 슬하의, 말하자면 이복 친동생이다. 그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아우 백낙청과 “가장 잘 통한다”고 했다. “낙청이는 나의 아우이기 전에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진정한 지성인으로 어떤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은 그의 정신의 고결함은 시대가 증명할 것이다.”
평생 부자간 정을 느껴보지 못했던 아버지는 변호사로 백병원 일을 돕다가 큰아버지와 함께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후 백병원과 인제학원의 역사는 백낙환이 중심이 돼 일궈냈다. 한때 현대화에 뒤처져 기울어가던 백병원을 천신만고 끝에 다시 일으켜 세운 뒤 숱한 고비를 뚫고 한길로 매진했다. 저동 백병원을 다시 짓고 부산 백병원, 서울 상계 백병원, 일산 백병원을 새로 지었으며, 동래 백병원을 인수했다. 지난 2월부터는 여섯번째 백병원인 해운대 백병원을 짓고 있다. 79년에 그가 부산 백병원과 함께 시작한 인제학원과 인제의과대학은 10년 만에 종합대학으로 승격해 지금은 5개 대학원, 7개 단과대학, 27개 학과, 15개 학부를 둔 굴지의 학원으로 성장했다. 그는 1989년부터 12년 동안 이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학원을 반석 위에 올려놨다. 오직 “정직, 성실, 근면”이 그의 무기였고 그것은 학교의 교훈이 됐다. 그는 지금도 이마누엘 칸트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정해진 일정을 어기지 않고 부지런히 병원과 학교를 돌고 조깅, 40년간 계속해온 일요일 등산 등 운동도 열심히 한다. 학교 인근에 있는 낙동강 청소와 수질개선 운동 등 캠퍼스 안팎 생태·환경운동에도 열심이다. 나이보다 20년은 더 젊었다고 자신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한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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