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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천여개의 점포가 몰려있는 용산 전자 상가(사진 이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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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떠오른 ‘용팔이’…20년전 용팔이가 왜 용산에
6월항쟁 20돌을 앞두고, 1987년의 뜨거웠던 민주화운동의 추억과 일화들이 40대 이상의 세대에게 새로워지는 즈음,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는 또하나의 키워드가 등장했다. ‘용팔이’라는 단어가 29일 누리세상에서 화제가 되었다. ‘용팔이’는 전두환집권 시절인 1987년 이른바 관제 야당의 틀을 깨고 김영삼씨를 중심으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려던 과정에서 조직폭력 세력이 창당 방해폭력을 행사한 사건의 핵심인물이다. “아니 6월항쟁 20돌이라더니, 젊은 누리꾼이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의 핵심인 용팔이에도 관심이 높아졌나?” 용팔이 관련 소식을 찾아보던 회사원 ㄱ아무개씨는, 기사를 눌러 확인한 순간, 세월의 변화를 실감했다. 누리세상의 ‘용팔이’는 20년 전의 용팔이가 아니었다. 이름에 ‘용’자가 들어가는 전주파의 보스였던 전설적 폭력배 ‘용팔이’는 종교에 귀의한 뒤 새 삶을 살고 있었다. ㄱ씨는 새로운 용팔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키워드로 떠오른 ‘용팔이’…20년전 용팔이가 왜 용산에? “손님, 맞을래요?”지난 28일,〈한국방송〉9시뉴스가 “용산 전자상가 ‘강매에 협박까지’” 뉴스를 보도하자 누리세상은 순식간에 ‘용팔이’를 성토하는 누리꾼들의 성토로 달아 올랐다. 그동안 ‘용팔이’라는 말의 쓰임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네이버의 오픈사전엔 ‘용팔이’가 “용산에서 초보자들을 골라 사기치고 못된 짓을 하는 상인을 일컫는 말” 이란 뜻으로 버젓이 올라와 있고, 각종 패러디물도 이미 많은 상태다. 하지만 이번엔 손님을 가장한 기자에게 “맞을래요”라고 협박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자 누리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발끈했다.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과 올블로그와 같은 메타 블로그들에는 ‘용팔이’가 인기검색어와 태그로 떠올랐다. 누리꾼들은 자신들의 경험담과 용팔이를 조롱하는 각종 패러디물을 웹상에 올리며 용산상인들에 대한 자성을 촉구했다. 블로거 ‘hohoman’은 “인터넷상에 사기꾼 정보를 업데이트 하는 사이트(www.thecheat.co.kr)에 용팔이, 테팔이(테크노마트의 악덕상인) 정보를 올리자”고 주장했다. 누리꾼 ‘boysbe02’는 “언어폭력과 사기질을 되풀이 하는 매리트 없는 용산 오프라인 매장들은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고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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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한 전자상가 내의 디지털 카메라 매장(사진 이정국 기자,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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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상인회 “억울하다…기자가 약 올린 것” 뉴스가 나가자 상인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기자가 해당 직원에게 3일간 찾아와 ‘약’을 올렸다고 항변하고 있다. 해당 업체는 인터넷 사진동호회인 ‘SLR클럽’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며 그 직원의 진술 내용입니다.(용산 사태)’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21일부터 23일까지 기자가 찾아와 물건을 살듯 하면서 직원을 조롱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저희 상우회에서는 어차피 터질 거 터졌다고 결론 내고 이번 기회에 획기적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차라리 정화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용산전자단지 진흥사업협동조합 이덕훈 조합장도 29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기자들이 계획을 세우고 고의적으로 약을 올린 것”이라며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용산상가 내의 7천여개 점포 가운데 그런 곳은 50군데도 안될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 조합장은 또한 “용산이 원래는 그러지 않았는데 불경기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이런 점포가 간혹 발생했다”며 “일부 점포의 문제를 용산 전체의 문제로 확대 해석해서는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누리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누리꾼 Scott은 “충분히 이해는 됩니다만, 여전히 용산에 대한 믿음은 바닥입니다. 말씀대로 제대로 정화하시길”이라고 답글을 달았다. 누리꾼 ‘초록의 밤’도 “구매자가 그러한 몹쓸짓을 해도 서비스업을 하는 판매자로서는 손님께 그런식으로 대하는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라며 “우리나라 최대상가인 용산의 서비스업 태도의 질이 그만큼 떨어져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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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된 용산의 업소가 올린 직원의 진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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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후 용산, 호객행위, 강매 줄었지만 30일〈한겨레〉취재진은 용산 전자상가를 직접 찾았다.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전자상가는 활기에 넘쳐 있었다. 처음 찾은 곳은 컴퓨터 부품으로 유명한 ‘ㄴ’상가였다. 상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일절의 호객행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상점에 들어가 “컴퓨터를 조립하러 왔다”고 말했다. 눈에 띄는 강매나 불친절한 태도는 없었다. 부품에 대해 꼬치꼬치 따져 물어도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수준이었다. “왜 이 상가는 호객행위를 안하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컴퓨터 조립하러 오는 손님들이야 다들 전문가니 호객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초보자들일 경우 대기업의 제품을 선호하고 직접 부품을 조립하는 사람들은 미리 사전에 인터넷을 통해 꼼꼼히 부품과 가격을 점검하니 ‘용팔이’문제가 생길 리가 없었다. 이덕훈 조합장도 “컴퓨터는 거의 문제가 없는 상태고 일부 디카나 엠피쓰리 판매장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다음에는 용산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ㅇ’ 상가의 디카매장을 찾았다. 평소에 이곳은 호객행위가 심해 걸어 다니기도 번거로울 정도인 곳이다. 하지만 뉴스가 터진 탓인지 눈에 띄게 호객행위 자체가 줄었다. 간간히 몇몇 상인들이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라고 말을 걸어왔다. 한 매장에 들러 “아빠백통(최근 인기있는 캐논의 망원줌 렌즈의 애칭) 얼마예요”라고 물었다. 처음 돌아오는 대답은 “카드요, 현금이요?”라는 말이었다. 금지된 행위이지만 카드로 결제시 더 높은 요금을 요구하는 ‘관행’은 그대로였다. 카드로 하겠다고 하자 5%를 더 지불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가격만 알아보려고 했다”고 하자 상인의 얼굴이 그새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엔 가격이 상대적으로 싼 카메라 렌즈후드(덮개)를 사러 왔다고 했다. 제시한 가격은 평소 인터넷에서 알아본 가격보다 비싼 가격이었다. “인터넷보다 비싸네요”라고 하자 직원은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며 “그럼 인터넷에서 사세요”라고 쏘아붙였다. 전자사전을 사러왔다는 한 시민을 만나보았다. 김아무개(27·여)씨는 “처음에 샤프 제품을 사러 왔는데 직원이 자꾸 다른 제품을 권하면서 더 좋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포기하고 안샀다”며 “요즘 동대문 시장에서도 옷 입어보고 마음에 안들어 사지 않아도 직원들이 불친절하게 하지 않는데 용산은 상대적으로 비싼 전자제품을 파는 데도 친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사러왔다는 이형석(23)씨는 “막상 와보니 인터넷보다 더 비싼 것 같고 자꾸 이것저것 끼워 파는 느낌이 들어 사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장 취재결과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컴퓨터 부품이나 전문가급 카메라의 렌즈부분은 상대적으로 ‘용팔이식 행위’가 덜했고, 일반인들이 많이 찾는 엠피쓰리 플레이어, 소형디카의 경우 아직도 용팔이식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용팔이’ 피해 안당하려면? ‘용팔이’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일단 사전에 인터넷 가격비교 사이트를 통해 꼼꼼히 가격을 체크해 보는 것이 좋다. 인터넷에서 나온 최저가보다 직접 용산상가를 방문했을 경우에 값이 싼 것이 일반적이다. 상당수 상가는 직접 인터넷 가격비교를 고객에게 확인시켜준 뒤 자신들의 가격이 ‘합리적’이라며, 구입을 권한다. 또한 사고자 하는 모델을 확실하게 정하는 것이 좋다. 어떤 상품을 구입할지 어정쩡한 소비자의 태도는 판매자에게 유리한 상품을 ‘엉겁결에’ 사게 되는 경우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용산 등 전문전자상가에서 다수의 누리꾼들은 “용산에 가는 교통비와 상인들과 입씨름 할때 느끼는 스트레스를 생각한다면 그냥 인터넷 쇼핑을 이용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누리꾼 ‘bill’은 “용산 상인들이 ‘불경기’를 탓하기 전에, 왜 많은 고객들이 용산을 외면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온라인뉴스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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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는 ‘용팔이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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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의 용팔이 사건이란? 87년 벽두에 터진 서울대 언어학과 4학년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군사정권 퇴진 움직임이 가속화되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개헌을 요구하는 민주화세력을 탄압하며 4월13일 ‘호헌선언’을 한다. 시민-노동자-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재야의 민주화운동고 함께 제도정치권에서도 이러한 민주화 열기를 담아내기 위한 변신을 하게 된다. 이 즈음 김영삼씨와 김대중씨를 중심으로 ‘통일민주당’ 창당이 본격화했다. 하지만 통일민주당 창당은 정치깡패에 의한 조직적 파괴작업에 직면하게 된다.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이 진행되던 87년 4월23일 인천 동북구 지구당 사무실에 20대 청년 1백50여명이 도끼로 출입구를 부수고 난입해 당원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사무실 집기를 불태운 뒤 사라지는 등 창당대회 첫날(20일)부터 마지막날(24일)까지 47개 지구당중 18곳에서 벌어졌다. 조직폭력배를 이끌고 창당방해를 한 중심인물이 ‘용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조직폭력배인 까닭에 창당방해 사건은 이후 ‘용팔이’ 사건으로 불렸다.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의 사주로 벌어진 이 폭력사태는 ‘용팔이’가 88년 검거되고 폭력을 지시한 신민당 인사들이 검거돼 실형을 살게 됨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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