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웅변대회
충성스런 국민으로 길들여지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권은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남과 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냉전 상황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당시 ‘반공’은 ‘사회’나 ‘도덕’과 분리된 아주 중요한 학과목이었다. 이 시간에 다뤄지는 주요 내용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비교 외에도 북한 정권의 잔혹한 통치 등을 가르쳤고, 이와 맞서 싸우는 우리 정부(정권과 대통령)는 정의의 화신처럼 묘사하였다. 초등학교 때 일이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외국의 사례를 들어 “선진국의 국민들은 자기 국가(國歌)를 들으면 그 자리에서 부동자세를 취하고 국기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며 우리 국민의 국기에 대한 무례를 비판하였다. 어린 나는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 수업을 파한 후 학교 뒤편의 방천(개천 제방)에서 놀고 있는데 학교에서 애국가가 들려왔다. 국기하기식이 진행 중 이었다. 나는 “국기에 대해 무례한 우리 국민들...”이란 선생님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노는 것을 중지하고 학교를 바라보며 오른 손을 가슴에 올렸다. 하기식이 끝난 후 누군가가 다가와 내 이름과 학교를 물었다. 다음날 아침조회시간이었다. 교장선생님 훈시 시간에 갑자기 내 이름이 불려졌다. 교단으로 올라오란 것 이었다. 영문을 모르고 불려나간 나에게 “투철한 국가관을 가진 어린이”란 교장선생님의 칭찬이 이어지고 경찰서장의 표창장이 수여되었다. 아마도 어제 이름을 적어간 사람이 경찰 관계자였으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국기 하기식은 범국가적 행사로 자리 잡았으며 이 때는 모든 사람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국기에 예의를 표해야했다. 이젠 국기에 예의를 표하는 것이 더 이상 상을 받는 세상이 아니라 국기에 대해 불경하면 벌을 받거나 타인의 집단적 지탄을 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피 묻은 손수건’에 대한 진실 자라는 학생들에게 충성심을 제고하고 반공정신을 주입시키기 위해 학교에서는 수시로 ‘반공표어쓰기’ ‘반공포스터 그리기’ ‘반공 글짓기’ 등의 행사가 있었고, 반공정신은 단순히 공산당을 반대하는데서 시작해서 ‘공산당을 이기자’는 승공(勝共)으로, ‘공산당을 말살하자’는 멸공(滅共)구호로 이어졌고, 구호가 과격해 질수록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과 거부감은 더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정권이 국민의 의식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반공웅변대회’는 더 없이 효과적인 국민교육수단이었다. 웅변대회는 각 학교와 교육청 도교육청 그리고 문교부(현 교육부)의 장이 주최하는 것 외에도 군 부대장이나 시장 군수 경찰서장 등 각급 기관장들도 이에 빠지지 않았다. 교내 웅변대회에 반대표로 출전했던 나는 학교 후보가 되었고 군 대회에 출전해 군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당시에는 마치 지금의 논술처럼 웅변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했고 ‘반공웅변원고’가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그런데 웅변대회가 잦아지다보니 어느 대회이든 한명쯤은 누군가 쓴 원고를 베껴서 나왔음직한 ‘피 묻은 손수건’이란 제목으로 출전하곤 했는데, 그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6.25 전쟁 중에 자기 삼촌이 괴뢰군의 총에 맞아 죽었고 그 때 흘린 피가 묻은 손수건을 고이 간직해 왔으며 앞으로도 이 손수건을 보며 공산당의 만행을 기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웅변이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왜 외삼촌이 억울하게 죽은 조카들이 유독 웅변에 능하며, 죽은 삼촌들은 한결 같이 손수건에 피를 묻혀 유품으로 남기게 된 것인지,, 이것은 아주 특별한 사회적 현상이고 사회학자들은 이에 대해 집중적 연구라도 했어야 할 판이다. 하지만 피 묻은 손수건을 흔들며 “외삼촌의 원통한 죽음”을 외치는 거의 모든 연사는 애초부터 외삼촌이 없었거나 외삼촌이 버젓이 살아있었다. 또한 그들이 주머니에서 꺼내 흔드는 꼬깃꼬깃한 손수건은 피가 아닌 빨간 잉크를 물들인 손수건들이었다. 반공에 세뇌되고 충성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연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흔들던 “빨간 잉크 묻은 손수건”을 바라보며 있지도 않은 외삼촌을 원통하게 잃은 연사의 비극에 전율을 느끼며 공산당에 대한 증오를 키워가야만 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사리분별이 없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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