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6.04 19:25
수정 : 2007.06.04 19:25
정말 밤새도록 걸었다. 동대문의 포장마차에서 나온 시간이 오전 1시 경인데, 의정부의 아파트에 도착하니 아침 여덟 시가 되어 있었다. 약 일곱 시간에 걸쳐 30킬로미터를 훨씬 넘게 걸어온 것이다. 오래 신어 발이 편한 구두가 워카로 기능했고 20킬로그램 가까이 초과한 몸무게가 군장을 대신 했다. 그러지 말라고 아내가 몇 번이나 전화했지만 나는 걸어서 가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후회는 빨랐다. 상당히 취한 주제에 지름길을 가려다가 그만 길을 잘못 들어 스카이웨이로 올라갔을 때부터 적지 않게 후회했다. 다시 내려가 우회할 엄두가 나지 않아 할 수 없이 계속 올라가서 미아리고개로 나왔을 때 이미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방위병 시절의 알량한 행군보다 몇 곱절은 힘들었다. 여기서부터 목적지까지는 최소한 25킬로미터에 이른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머니를 털면 택시비는 될 터였고 돈이 없다면 편의점에서 카드로 뽑으면 그만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터덜거리며 미아리고개를 내려가 의정부로 향했다.
그날은 자주 만나는 친구를 만난 날이었다. 고교 1학년에 같은 반으로 만나 거의 30년을 사귀어 가장 가깝기도 하지만,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던 것은 그 친구가 가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왜 아내와 자식이 없는지는 굳이 상세히 말할 필요가 없겠다. 나는 다음 날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었고 그는 외박을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던 것이 자주 만나게 되는 주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실직을 당한 이후에는 주변에 먼저 전화하기가 매우 부담스러웠다. 처지가 곤궁하여 술을 얻어먹으려거나 물건을 팔아달라는 입장에 선 것도 아닌데 먼저 전화하기가 매우 꺼려진다. 그리 부담을 가지지 않는 몇몇을 제외하면 상대방이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이상에는 거의 만날 일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그 친구는 가장 반가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술을 무척 즐기며 문학과 역사도 제법 논할 줄 아는데다, 당구도 비슷한 수준으로 티격태격하였으니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춘 적합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말하다보니 당구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사실 나는 당구를 그리 잘 치지 못한다. 겨우 120 가량 칠뿐이어서 직장생활 할 때는 아예 못 친다고 말하곤 했었다. 실력 같지도 않은 당구 치는데 꼻아 박을 돈 있으면 소주나 한 병 더 마시는 것이 예전의 신조였다. 그러던 내가 실직 이후에는 큐대를 잡게 된 것은 아무래도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용도인 것 같다.
중 1인 아들놈과 고 1인 딸아이는 각각 1주일에 2차례 과외를 받는다. 아들놈의 과외는 이르게 시작하고 시간도 불과 1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내 방에 들어가 책을 읽거나 약간 눈을 붙이면 그만이지만 딸아이는 그렇지 않다. 오후 8시 경에 시작해서 10시가 넘겨서야 끝나는 실정이다. 그 시간 동안 집에 있으려면 - 아내는 12시가 넘어야 들어온다 - 보통 고역이 아니다. 과외선생도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고 딸아이도 집중이 되지 않으니 실업자가 피해 줄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다음 시간을 때우려다보니 자연스레 당구를 치게 된 것 같다.
말이 약간 새나갔다. 그날 내가 철야행군을 강행하게 된 것은 친구 때문이었다. 동대문에서 만나 소주 한 잔 하고 당구를 친 다음, 다시 포장마차에 들른 시간은 12시를 약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곱창 볶음에 두어 병을 마시고 나니 육체를 조인 볼트가 슬슬 풀어지기 시작한다. 정신도 뜨물에 담긴 렌즈처럼 앵글이 흐려졌지만,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는 실직자의 면책특권은 내일도 유용할 것이다. 다시 한 병을 마시려는데 놀랍게도 친구는 나와 잔을 주고받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옆에 있는 아줌마들과 건배를 하면서 신나게 노가리를 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 흔쾌하지 않았지만 법적인 총각으로서 그리 하자가 될 행동은 아니었다. 총각이 아니라고 해도 어차피 그런 세상이다. 내가 전화할 때마다 기꺼이 시간을 내 준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울 일이다.
제법 예쁘장한 아줌마들은 잘 먹고 잘 마셨다. 술꾼인 내가 보기에도 만만치 않게 마시는데다, 먹성도 시원스러워 곱창과 족발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웠다. 마치 힘든 노선을 가려는 트럭이 연료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친구가 이쯤이야 책임지겠다는데 실직자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쓰게 웃으며 혼자 잔을 비우다 슬며시 일어났다. 그런 분위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막 나가려는데 친구가 잡아끌었다. 병에 남은 것만 마시고 노래방으로 가기로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라는 것이다. 아줌마들도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밖으로 나갔다. 곧 따라 나온 친구가 「시간도 많은 놈이 왜 이러느냐」며 짜증스럽게 만류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걸어갈 생각이다」라며 대답했다. 그것이 어이없는 철야행군의 시작이었다.
포기하려던 충동을 몇 번이나 뿌리치고 거의 도착했을 때는 아이들이 등교할 무렵이었다. 아침부터 술 냄새 풀풀 풍기며 비틀거리는 아비의 모습을 목격하게 할 수는 없다. 근처의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을 먹으며 충분히 시간을 보낸 다음 뒷길을 걸어 아파트에 들어갔다. 아내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어차피 나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설명 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구두를 벗자 워카의 비중이 없어지고 시체처럼 드러눕자 군장의 무게가 사라졌다. 아무튼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전혀 예정에 없던 철야행군은 끝이었지만 마라톤에서 우승하고도 월계관을 쓰지 않은 것처럼 허전했다. 아직 덜 깬 술기운 속에서 헤집어 낸 그것은 「총」이었다. 현재 나의 삶은 총 없이 행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에게 먹일 것을 사냥할 무기를 잃은 자가 무슨 가장이겠는가? 새카맣게 죽어버린 발톱을 바라보며 그저 탄식할 따름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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