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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미선양 5주기 촛불시위에서 고교생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 한겨레 블로그 바오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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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6월. 전 국민이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을 때, 중학생 소녀 둘이 미군의 전차에 치어 처참하게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월드컵 특수에 가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넘어 갈 뻔 했던 사건으로, 나도 사건이 발생한 한참 후에나 인지 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사건의 경위가 어찌 되었건, 나에게 있어선 타인의 죽음이었고, 타인의 불행이였다. 안타까운 일이었고 사건 후의 미군의 행위가 불쾌하긴 했지만, 내 동생이 죽었다는 느낌이나 미군과 미국에 대해서 엄청난 반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회와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었다.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의 시니컬이랄까.
내 입장이야 어찌되었든 사회는 반미 운동이 불일듯 일어났고, 여기에 미군의 처신이 더더욱 사람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급기야 맥도날드, 나이키(실제로 나이키는 일본 회사가 되었지만) 등의 미국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20대의 수많은 네티즌들은 이 운동에 너도나도 동참했고, 마치 반미와 불매운동이 애국인 마냥 안 하면 매국노가 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불매 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점심 시간대였다. 오후 1시정도에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12시 정도에는 어김없이 버스를 타고 종로를 거쳐가게 되어 있었다. 종로 1가에 맥도날드 매장이 하나 있다. 버스 정류장과도 거리가 가까운 목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불매 운동이 일었던 그 주, 매장은 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약 3주 정도의 시간이 흘러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게 된 맥도날드 매장,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난 솔직히 효순이, 미선이가 내 동생같다고 생각 해 본 적은 없다. 우리나라의 힘 없음이 안타깝고, 처참한 죽음앞에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영혼과 유가족의 안타까움은 느낄 수 있었지만, 내 동생, 내 가족이 죽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매 운동도 너무 ‘오버 힛’(over heat) 이란 느낌이었고, 참여하지도 않았다. 내게 있어선 사회의 여러 구성으로 인한 안타깝고 억울한 또 하나의 희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도날드의 넘쳐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난 뇌가 5만 볼트의 전기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환멸이 넘쳐났고, 구역질이 넘쳐났다. 뉴스에서 내 동생 살려내라! 라고 소리치며, 인터넷에서 미국 제품 죽을 때까지 쓰지 않겠다면서 불매 운동을 지지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맥도날드를 먹고 있는 것이였다. 나이키나 기타 등등의 미국 제품들도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아마 이 때부터 인간에 대한 환멸이 시작되었고, 조선인을 냄비, 엽전이라고 놀리는 것에 대한 분노가 사라졌을 것이다. 이해를 했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는 나도 조선놈이고, 엽전이고 냄비가 된다는 것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얼굴에 침을 뱉지 않기 위해 같은 동족을 욕하는 천하의 둘도 없는 바보짓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그 가치관이 싹 변해 버렸다. 냄비와 엽전이 맞다. 나도 그 중 하나다,라는 자포자기가 이후로 내 세계관에 박혀 버렸다. 자조적인 반성 정도라는 멋진 말로 미화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민족-포기 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이 사건 하나로 한민족을 매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며, 뛰어난 민족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뛰어남이, 무궁한 가능성이, 극단적 이기주의와 결합 되었을 때 파생되는 엄청나게 추한 모습을 난 목격해 버린 것이다. 단 한달도 못 가는 애국심, 단 한달도 가지 않는 민족 정체성. 대체 이걸 어떤 언어로 덮어야 정당성이 확립된다는 말인가? (후에 개똥녀 사건으로 확실시되는) 정말로 이 대한민국 땅에는 표면적 동족감 외의 이웃과 형제라는 개념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거짓과 가식, 그리고 냄비와 같은 얇은 분노와 아둔한 정의감이 이 땅에 만연하고 있다는, 그리고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밀려 올라왔다.
물론 그 와중에도 불매 운동을 계속하는 사람들, 효선이와 미순이의 명복을 빌며 안타까워하며 분노하고 계신 분들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다수라고는 아무도 말 못할 것이다. 그것이 날 분노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맥도날드의 인산인해를 경험 한 직후 약 1년 넘게 난 홀로 미국 제품 불매 운동을 했다. 아무도 모르게 미국 제품을 먹지도 사지도 입지도 사용하지도 않았다. 영어조차도 공부하지 않았고, 미국 영화도 보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아무도 모르게 1년을 넘게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했다. 그들이 내 동생 같다거나, 뿌리 깊은 민족성에 의거한 동질성으로 인함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더럽고 추악한 사회가 너희를 이용해 먹어서 미안하다는, 그리고 나 또한 그 사회의 구성원의 한 사람이고, 민족의 한 사람이라는 개인적인 사죄를 한 것 뿐이었다. 민족과 사회를 대표한다는 거창한 목적도 아니였고, 그럴 생각조차도 없었다-환멸을 느낀 자들을 위해 내가 사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1년여를 보내고 다시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었을 때, 과연 우리는, 나는 기억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광화문과 시청을 꽉 채울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 시위를 했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던 그 일을 과연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분노했던 그 일을….
난 지금도 맥도날드는 잘 가지 않는다. 햄버거 자체를 잘 안 먹기도 하지만, 2002년 6월의 그 사건이 기억나 발걸음이 쉬이 그리로 옮겨지질 않는다.
2002년 6월, 피어 보지도 못 하고 억울하게 죽어 간 두 여중생, 효순이와 미선이의 삼가 명복을 지금도 빕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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