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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2 18:08 수정 : 2007.06.22 18:08

작은 영웅들

기차도 강도 없는 깡촌에서 자란 나는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주말에 시골집에 가서 주말을 보낸 뒤 월요일 아침 대전가는 첫 차를 타기 위해 버스승강장에 들어설 때 였다. 때 마침 터미널 매표소 부근에는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남루한 차림을 한 남자가 음료수와 스텐 대접을 들고 터미널에 있는 승객에게 다가서면 승객들은 기겁을 하며 그의 주변에서 도망치는 기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마주치는 사람마다 "이 콜라 좀 마셔요." 라며 음료수를 마실 것을 권하고 있었고, 그와 마주친 사람들은 한결 같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에서 달아나고 있었다.

아무도 응해주지 않는 초대에 힘이 빠져보이는 그가 안돼 보였다. 그가 내게로 다가와서 음료수를 마실 것을 권했다. 나까지 거절하면 그가 너무 비참해 질것 같았다. 새벽에 스텐 대접에 담긴 음료수를 마시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고맙습니다."며 대접을 받아 쓴 한약을 마시듯이 벌컥벌컥 마셔 치웠다.


그가 흐뭇한 모습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료수를 마시자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주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한사코 사탕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학생 나는 그 동안 남에게 많은 신세를 졌어. 그래서 그게 너무 감사해서 누구에게라도 이렇게 나누어 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그가 남에게 빚을 갚지 않으면 안될지 궁금했지만 그 궁금증은 금방 해소 되었다.

노모를 모시고 홀로 사는 그는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았다. 자기 앞으로 땅한평 없었고 집도 없었고 끼니를 때울게 없어 굶기를 먹듯이 했다. 시골에서 돼지를 키우면서 먹을게 없어서 냉수로 허기를 때우다가 하루 한끼 정도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라면을 삶아먹지 않고 물에 불려먹었다."고도 했다. 그는 의아해 하는 나에게 "끌여 먹는 것 보다 불려먹는 것이 더 배가 부르기 때문.." 이라고 했다.

그의 혹독한 굶주림의 역정을 듣다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내가 물으니 그의 얼굴에 갑자기 활기가 넘쳤다. 요즘은 "아주 잘 살고 있다." 며 자신이 키운 돼지가 수십마리로 불어났으며 하루 하루 사는게 너무 "보람차다." 고 했다. "보람차다."는 표현이 어딘지 그의 행색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가 다시 한마디 했다.

"학생..내가 다음달에 대통령각하 표창을 받게 됐거든..학생도 시간나면 시상식에 오도록 해.."

무슨 말 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말인 즉슨 자신이 새마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잘살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전국을 떠돌며 거리 청소 등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 사실이 대통령각하께 보고되어 표창을 받게 되었다는 것 이었다.

그는 묻지도 않은 말을 구구절절 늘어 놓았다.

대통령각하께 표창을 받을 생각을 하니 너무 기뻐서 잠도 오지 않고 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전국을 순회하며 거리도 청소하고 사람들에게 음료수도 대접한다는 것 이었다. 이제야 모든 정황이 이해가 되었다.

"어머님은 어디 계세요?" 그는 밖을 가리켰다.

세상에..나는 자지러지듯 놀랐다. 팔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께서 터미널 밖에 세워진 리어카(손수레)에서 담요를 뒤집어 쓴 채 떨고 있었다. 나의 충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대통령각하 칭송은 계속 되었다. "다 대통령 각하 덕분이지.. 그래서 엄니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는거야.." 하지만 리어커에서 떨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에 기쁨은 없어 보였다. 깊숙히 패인 주름살 아래 감추어진 눈동자에는 눈물이 글썽이는 것만 같았다. 아들이 어서 집으로 돌아가기만 고대하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그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첫차가 출발할 시간이 되었기도 하지만, 표창장 하나로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사회가 미워졌다. 버스에 오르는 나에게 그는 외쳤다."다음달에 시상식하는데 올수 있으면 꼭 와!.. 못오면 신문이라도 봐..신문에도 날거야.."

'성웅 이순신'과 소년의 죽음

오늘날도 이순신장군은 왜적의 침입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박정희 시대에 이순신 장군은 단순한 영웅이 아닌 성웅(聖雄)이었다. 박정권은 아산의 현충사를 성역으로 꾸미고 모든 공무원의 참배를 강요했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을 통해 듣게된 현충사 참배기는 한마디로 '강요된 숭배'였다.

참배를 다녀온 선생님은 "현충사 참 잘 꾸며 놨데.. 세상에 거기다가 넓기는 젠장하게 넓고 안에 변소(화장실)하나 없어서 오줌보 터지는 줄 알았다." 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각지에서 모인 교사 수백명이 관광버스를 타고 현충사를 참배하는데 안내원의 설명을 받으며 경내를 도는 데 서너시간이 족히 걸렸다고 한다. 현충사 내부에는 금연은 물론이고 화장실도 설치되지 않아 미처 볼일을 미리 보지 못한 선생님들은 고문 아닌 고문을 당했노라고 한다.

박정희는 왜 나라를 국난에서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이름 앞에 영웅이란 칭호만으로 부족해서 성웅이라는 전대미문의 칭호를 붙여야만 했을까?

'왜구'의 침입으로 백척간두에선 조선의 운명을 당시 남북의 대치상황과 동일시함으로서 자신의 쿠데타가 북괴의 남침으로 부터 나라의 안위를 구하기 위한 충정인것처럼 정당화시키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당시 사회에서 '성웅이순신'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모든 학생이 단체관람해야 했고, 이순신 장군의 호국 충절은 반공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백일장 글쓰기의 주제가 되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순신 찬양 백일장에 입상한 글들은 책자로 인쇄되어 각급학교에 배치되었고, 학생들은 다시 이 책의 독후감을 숙제로 써야만 했다.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였을 뿐 아니라, 국가관 또한 뛰어났다. 소년은 특히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여 틈만 나면 부모님과 함께 현충사를 참배하였다.

그런데 소년에게 백혈병이란 청하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소년은 잠시 절망했지만 낙담하지 않았고 예의 그 총명함으로 이순신장군을 흠모하는 글을 계속 썼다. 이 소식은 대통령에게 보고 되었고 그의 병실에는 영부인의 문안 편지와 전국에서 쾌유를 비는 위문편지가 답지되었다. 하지만 소년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결국 숨을 거두게 되었다. 소년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충무공에 대한 숭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죽기 전에 "자기의 몸을 현충사 쪽으로 눞혀달라." 는 것 이었다. 소년은 현충사를 바라보며 죽어 갔다.

소년의 일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엮은 라디오 드라마를 어린 나는 눈물을 흘리며 들어야했다.

그 소년의 죽음은 노량해전에서 왜구의 화살을 맞고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며 숨졌다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모습 만큼이나 장엄하게 묘사되었다.

정권에 무조건적으로 충성하기를 바라는 한 독재자의 탐욕은 수 많은 눈먼 작은 영웅들을 양산하고 있엇다. 그에게는 팔순이 넘은 늙은 노파도, 죽음을 눈 앞에둔 어린 소년도 자신에게 충성심을 자아내게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을 뿐 이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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