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의 선거들
막걸리 선거와 다릿발국회의원67년 치러진 대선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리를 나부끼는 현수막과 황소가 그려진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그리고 윤보선 등의 포스터와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간헐적으로 떠오를 뿐이다.
아버지께서 일찍 타계하신 관계로 여자의 몸으로 졸지에 6남매의 생계와 아버지가 남긴 빚을 책임져야만 하는 가장이 된 어머니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해 ‘뇌신’이라는 두통약을 영양제처럼 달고 살았지만 선거철이 다가오면 화색이 돌았다. 선거에 출마하는 각 후보들이 가장 손쉽게 유권자를 유혹하는 것이 음식대접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집은 장터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선거철이 되면 낮에는 갖가지 구호와 연설소리로 귀가 얼얼할 정도였고 밤이 되면 술대접에 취한 취객들의 고성방가로 시끄러웠다.
초등학교 한 담임 선생님은 사회시간에 당시의 선거 풍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선거는 막걸리 선거고, 고무신 선거여.. 막걸리 한잔 맥이고 고무신 한 켤레 사 주고 투표장 들어갈 때 제일 앞에 칸(1번 후보)에 찍으라고 하면 선거 끝이여..”라며 혀를 차셨다.
선생님은 어눌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야들아! 니들 다릿발 국회의원이 뭔 줄 아냐?” 우리가 알 턱이 없었다. “느그들 동네에 가면 다리(교량) 세울라고 다릿발 세워논 거 있잖냐? 그게 다 국회의원 후보들이 세운 건 데.. 선거 하기전에 다리 발 하나 세우고 ‘내가 당선되면 이 동네에 튼튼한 다리를 놓아주겠소.’하는 거여..그리고 선거 끝나면 4년간 딴전만 피다가 다음 선거 때면 다리발 하나 또 세우고 ‘나를 뽑아주면 튼튼한 다리를 놓아주겠소!’하는 것이지..” 박정희의 처남이며 육영수씨의 오빠이기도 했던 당시 우리 고향 지역구 국회의원인 육인수씨를 빗대 한 말이었다.
71년 대선과 ‘법창야화’
쿠데타 집권 후 두 차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임기를 연장하기 위하여 69년 제 5차 개헌(3선개헌)을 단행한다. 박정희는 3선 개헌을 위한 정지작업으로 67년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이 개헌 의결 정족수인 3분의 2를 차지하기 위해 관권. 금권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69년 4월 친김종필계의 항명 파동 등 진통을 거친 후, 대규모 숙청작업이 이루어 진 뒤에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3선 개헌에 성공한 박정희가 71년 대선에서 국민들에게 읍소한 공약은 자신이 추진해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무리 하게 해 달라.”는 것 이었다. 하지만 선거 판세는 온갖 관권, 금권, 언론을 동원했음에도 김대중 후보에게 수세로 밀리기만 했고 결국 박정희는 차기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해 달라는 참모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이번이 마지막 대선이니 한번만 더 자신을 밀어 달라.”는 맘에 내키지 않는 공약을 내걸게 된다.
잘 알려졌다 시피 71년 대선은 우리의 고질적 지역감정을 자극한 최초의 선거이다.
당시 어머니의 식당을 찾은 손님들 사이에는 “니꾸쌰꾸(고향에서는 호남사람을 이렇게 불렀다.)와 같이 동행하면 가방을 조심해라. 잠시만 한 눈 팔면 물건이 없어진다.”거나 “앞에서는 살살 거리다가 뒤통수를 친다.”는 식의 근거 없는 모함이 떠돌았다.
74년 MBC라디오는 ‘법창야화’란 기획드라마를 방송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우연인지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것 이었는지 몰라도, 하필 거기서 소개된 첫 번째 사건이 ‘강진 갈갈이사건’이었다. 제목만 들어도 섬뜩한 이 사건은 강진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예정보다 짧은 기간에 방송을 마쳤지만 이 방송을 들은 이후 지금까지 전남 강진 이름만 들으면 ‘갈갈이 사건’을 떠올릴 정도로 방송은 강진에 대해 아주 나쁜 선입견을 심어주었다. MBC는 얼마 후 ‘무등산 연쇄 살인사건’을 방송하였고, 이 사건 또한 무등산과 광주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게 했다.
강진이 예와 전통의 고장이며, 광주가 예술과 민주의 도시이고 무등산이 그 이름처럼 계급을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산이라는 사실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고, 이 일로 사람의 ‘편견’이란 게 얼마나 우연한 기회에 무의식중에 자리를 차지하며 부지불식간에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지역감정 자극은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87년 대선에서 극에 달했다.
근거를 댈 수 없는 특정 지역에 대한 모략은 이른바 ‘카더라’ 형태로 번져나갔는데 예를 들면 대전 사람이 광주의 아무개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려고 하니 “‘김대중 선생 만세!’를 세 번 외치지 않으면 주유를 해줄 수 없다 카더라..”식이었다.
유신 쿠데타
어렵사리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다음해 10월 17일 갑자기 유신 쿠데타를 단행한다. 스스로가 자기 정권에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그는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다. 그 후 우리 사회의 모든 공직자와 언론사 그리고 학자들은 일제히 박정희의 나팔수가 되어 유신체제의 찬양을 시작했다. 신문과 방송은 양심을 저당잡힌 학자들이 앞장 서 유신의 역사적 당위성을 역설하였고, 선생님들은 ‘10월 유신은 일본의 메이저유신처럼 우리나라를 선진국 대열에 합류시킬 것’이라며 같은 해 11월 12일에 있을 유신개헌 투표에서 부모님들이 찬성표를 찍을 수 있도록 잘 설명하라고 당부하였다.결국 민주주의에 대해 무지하고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공무원의 말이 모두 진실인줄 알았던 순박한 국민들은 그것이 스스로의 목을 죄는 것인지도 모른 채, 91.5% 이상이 투표에 참가하고 91.7%의 높은 찬성표를 던져 박정희의 유신쿠데타를 최종 승인하게 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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