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 형 억울한 죽음 구명신청 냈던 고경환씨
가슴이 먹먹했다, 사건 접수기한이 지나 진실을 규명할 기회가 더는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57년을 기다렸는데 …!” 억울하게 죽임당한 형의 사연을 싸들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찾았던 지난달 중순 일이다. 고경환(48·경기 고양시)씨는 고개를 떨궜다. 기회 더 없단 말에 고개 떨궈“좌익·우익이 뭔지도 모르던 형 연맹 가입 뒤 죽임당해”
‘6개월 연장’ 법안에 실날 희망 1950년 여름, 형은 마을에 들이닥친 국군과 경찰 손에 끌려갔다.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라는 이유였다. 마을 이장은 할당된 가입자 수를 채운다며 의사도 묻지 않고 형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걸핏하면 불려나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라고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게 화근이 돼 무참하게 죽임을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형은 며칠 만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당시 마을에서 10명이 같이 끌려갔고, 5명이 숨졌다. 형수가 옷의 바느질 모양을 보고 형의 주검을 가려냈다. 부모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인적 드문 산기슭 그늘에 형을 묻었다. “당시 형은 갓 결혼한 새 신랑이었답니다. 좌익·우익이 뭔지 알지도 못했고요.” 3년 동안 부모는 문밖에 나서지 않았다. ‘빨갱이’ ‘사상범’ 가족이라는 낙인에 짓눌려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평생 “자식 죽인 못난 부모”라며 가슴을 치다 돌아가셨다. 얼굴도 모르는 형이지만, 맏형의 죽음은 고씨의 삶에 무겁게 얹혀 있었다. 세상 좋아지면 다 밝혀질 거라는 막연한 희망은 의외로 위안이 됐다. 50년이 훌쩍 지나 진실화해위가 불행한 역사 속에 희생된 억울함을 풀어준다고 나섰다. 1만859건이나 되는 사례가 접수됐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사건들 속에 형의 죽음은 없다. 2005월 12월 시작해 지난해 11월 말로 끝난 신청기간을 놓친 탓이다. 진실화해위에는 접수기간을 놓쳐 추가 접수를 문의한 사건만 200건 넘게 들어와 있지만, 추가접수를 받으려면 법 개정이 필요하다. 강창일 열린우리당 의원은 지난달 진실화해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6개월 안에서 접수기한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피해자는 57년을 고통 속에 살았는데, 가해자(국가)는 1년인 접수기한을 놓쳤다고 영영 억울함을 풀어줄 수 없다고 한다”며 고씨는 “가혹하다”고 했다. 가족들은 해마다 7월이면 고향인 경북 문경에서 맏형의 제사를 지낸다. 접수기한을 넘겨 진실규명 신청을 못한다는 말을 가족들에게는 아직 꺼내지 못했다. “그저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는 것만 밝혀내면 됩니다. 가해자가 산소에 추모비 하나만 세워주면 나중에 부모나 형을 뵐 낯이 있을텐데 ….” 쉰을 바라보는 막내 동생은 응달에 묻혀 있는 스무살 형이 안쓰럽다.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국민보도연맹
보도연맹=1948년 12월 공포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전향 기회를 준다’는 명분으로 조직된 40만명 규모의 단체. 지역 할당제 탓에 좌익과 무관한 사람들도 반강제로 가입됐다. 한국전쟁 초기에 군·경은 적한테 동조할지 모른다며 이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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