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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02 19:28 수정 : 2007.07.02 19:28

1970년대 도덕 교과서에 실린 태극기와 국기에 대한 맹세.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는 맹세문 대신 ‘자랑스런 태극기‘라는 표어가 실렸다

서울에 온 지 닷새째 되는 오늘 아침. 아직 시차 적응이 완전히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른 아침 5시 무렵에 눈이 떠졌습니다. 대충 몸을 정리하고 글을 좀 읽다가 무심코 TV를 틀었죠. 마침 MBC 와 KBS 에서 애국가 1절이 거의 동시에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갖가지 장면과 함께 어우러져 나오는 애국가를 저는 끝까지 다 들었습니다. 가사도 자막으로 나왔는데, 15년 가까이 해외에 살다가 잠시 귀국한 저에게는 모든 게 새로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유신시절 말기인 70년대 후반에 고등학생이었는데, 마침 제가 다니던 학교는 월요일 1교시 '애국조회' 시간에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불렀으므로, 기억이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3절 가사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떤 거부감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고, 4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좀 더 심해졌습니다. 옛기억의 호기심으로 즐겁게(?) 듣기 시작한 애국가였는데, 막상 노래가 끝났을 때에는 뭔가 씁쓸한 것이 제 마음을 눌렀습니다.

애국가의 3, 4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4절>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성을 다 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예전에는 미처 못느꼈던 건데, 이제 고국에 돌아와 다시 듣다 보니 일감으로 떠오른 느낌은 가사의 내용이 무언가 "너무 일방적"이라는 겁니다. 즉 <국가>라는 존재가 <국민>들에게 일방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제할 뿐, 국가가 국민들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암시도 없다는 겁니다. 있다면, 국민들의 충성을 일방적으로 받는 존재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뿐입니다.

국민국가(nation-state)를 건설하는 초기 과정에서나 있을 법한 내용의 국가인 셈입니다. 다양한 국성원들을 하나의 정치체의 구성원으로 동원하고 교육(세뇌)하던 시대의 국가관이 그대로 투영된 가사가 바로 애국가 3, 4절이죠. 제목부터가 <애국가>이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현재 애국가 가사 3, 4절은 일종의 충성서약을 노래로 부르는 내용입니다. 특히 마지막 4절, <괴로우나 즐거우나>에 이르면 국가에 대한 충성은 거의 종교 차원으로까지 올라갑니다.

이제는 시대가 흘러 개인이 자기의 국적을 골라 가질 수 있는 시대로 이미 진입해 있습니다. 이제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르면, 개인이 자기 정부를 골라잡을 때 마치 쇼핑하듯 골라 선택하는 시대가 더 본격적으로 도래할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마찰은 당근 있겠으나, 그래도 역사의 흐름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지구가 이제 하나의 지구촌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면, 앞으로는 누구라도 자기 능력만 되면 너 나은 정부, 자기 입장에 더 유리한 정부를 찾아 이사하는 시대가 도래할 겁니다. 마치 능력만 된다면 다들 강남으로 이사하고 싶어하듯 말이죠. 이런 현상은 이미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죠. 능력이 되는 젊은이들은 더 부강한 나라로, 돈 많은 퇴직자들은 세금 적게 부과하는 따뜻한 나라로... 약소국 가난한 사람들은 일자리만 준다면 그 어디라도... 이런 현상은 이미 우리들 가시권 안에 들어와 있잖아요.

"나는 의무를 다 했는데, 국가가 나에게 해 준 게 뭔가?"

"내 인생에서 도대체 조국과 민족이 무슨 의미야?"

주위 사람들로부터 (대개 신분이 불안정한 고급 인력)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벌써 이런 시대입니다. 박통, 전통 때에는 이런 말 무심코 하다 재수없이 걸리면, 간첩으로도 몰릴 수 있는 그런 시대였는데, 이제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국가가 자기 국민을 힘으로 붙들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미국의 국가나 다른 서양국가들의 국가 가사 두어 개를 비교하면 혹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지도 몰라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서양 일부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는 국민에게 충성을 강조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에 충성한다는 문장 구조를 이루는 게 제법 많습니다. 즉 내가 충성을 바칠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 다른 말로 국가는 이래야 한다는 일종의 규정이 노래 가사에 드러난다는 거죠. 따라서, 만일 국가가 그런 규정을 어긴다면 나의 충성 의무도 자동적으로 없어지는 거죠. 다른 말로, 국가와 국민 개인 사이의 계약이 파기된다는 겁니다. 개인이 계약을 어길 경우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그 개인(범법자)을 응징(처벌)하는 게 정당하다면, 같은 계약적 권리를 국민들도 가져야 하는 게 공평하지 않을까요? 네-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애국가 3, 4절은 이참에 아예 삭제하는 것도 무방할 것같은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후렴을 네 번씩이나 반복하며 굳이 4절까지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1, 2절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오늘 아침에 스치길래 잠시 짬을 내어 끄적여 보았습니다. ^^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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