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7.03 18:16
수정 : 2007.07.03 18:16
기가 막혔다. 말문도 막혔다.
텔레비전 예고 프로그램을 보고 ‘설마’를 반복하며 경기 수원남부경찰서를 찾은 양아무개(43·여)씨는 두 달여만에 찾은 자신의 딸이 숨져간 이야기를 들으며 아연실색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잦은 가출로 밉기도 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이렇게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엄마 품으로 돌아 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경기 수원역에서 2만원을 훔친 도둑으로 몰려 청년 노숙자에게 맞아 숨진 ‘노숙 소녀’(<한겨레> 5월17일치 9면)의 신원이 50여일만에 확인됐다. 이름 김아무개, 나이 15살, 용인시 한 중학교 3학년, 숨지기 열흘 전 가출…. 경찰이 밝힌 ‘가엾은’ 노숙 소녀의 신원이다.
김양은 지난 5월14일 새벽 5시30분께 경기 수원시 한 남자고등학교 화단에서 온몸에 멍이 들고 머리에 상처를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김양은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뚫린 운동화,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지갑도 사진도 없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통 속에 숨져간 얼굴 뿐이었다.
경찰은 소녀의 옷차림이 매우 허름하고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은 점 등으로 미뤄 오랫동안 노숙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고 수원역 일대 노숙자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였다. 당시 경찰은 ‘한 여성이 돈을 훔쳤다는 이유로 남자 노숙자한테서 얻어맞았다’는 첩보를 입수해, 사건 발생 16시간여 만에 정아무개(29)씨를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정씨는 경찰에서 “역에서 만난 꼬마(소녀)가 후배 애인의 돈 2만원을 훔친 것으로 알고 인근 학교로 데려가 주먹과 발로 마구 때렸지만 죽을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조사 결과 정씨가 숨진 소녀를 실제 돈을 훔친 노숙자 김아무개(24·여)씨로 착각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숨진 소녀가 김씨와 생김새가 비슷한데다, 이날 입고 있던 옷 색깔도 같아 정씨의 오해를 불러왔던 것이다.
이처럼 범인을 순식간에 붙잡은 경찰은 그러나 정작 피해자인 김양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지금까지 수원시내 한 병원에 주검을 안치하고 신원 확인작업을 벌여왔다. 얼굴 사진을 촬영해 전국 경찰에 신원을 수배해 수십명의 가출 부모들을 만났지만 가족을 찾을 수 없었다.
때문에 경찰은 신원확인 작업을 사실상 포기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언론보도를 통해 이 사건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던 <서울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의 제안으로 인터넷을 통해 ‘이 소녀의 이름을 찾아주세요’라는 공개 신원 확인 운동을 벌였다.
결국 지난 1일 저녁 예고 프로그램을 본 양아무개씨가 “내 딸과 비슷한 것 같다”는 연락을 경찰에 해왔고, 양씨는 2일 오전 경찰서와 병원을 오가며 숨진 딸의 사진을 확인했다. 양씨는 병원에서 “주검이 많이 부패해 직접 확인이 어렵다”는 말에 따라 부검 전 사진을 보고 딸의 주검을 확인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양은 부모 이혼 뒤 어머니와 함께 살다 지난 해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또래들과 어울려 다니며 학교를 가지 않다 가출했다. 여러번 가출을 반복했으나 항상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경찰에 따로 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김양의 신원 확인 마지막 단계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어머니와의 유전자 검사를 맡겼다. 수원/김기성 기자
player1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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