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반미주의자 ?
박정권과 미정권, 애증(愛憎)의 역사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가 사라진 오늘날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사라졌지만 쿠데타로 찬탈한 정권들이 자신들의 부정한 정통성을 희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보편적으로 이용한 것은 이른바 주변 대국(大國)들의 인정을 받는 일 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역성혁명이란 이름하에 고려를 멸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대국인 명나라의 인정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박정희나 전두환 두 쿠데타의 수괴들은 쿠데타 직후 당대의 대국인 미국의 환심을 사는 일에 몰두 했다. 미국이 정권의 후견인이 되어준다면 자기들의 쿠데타가 국미들에게 암묵적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 박정희는 국가재건회의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쿠데타를 승인 받았고, 전두환은 '국보위원장'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쿠데타 정권이 미국 정부에 순종할 것을 다짐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 케네디에게 자신이 '반공주의자'란 확신을 심어주고 귀국한 박정희는 미국의 지속적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하고, 베트남 파병을 "'6.25 '전쟁에서 우리를 구해 준 은혜를 갚기위한 보은(報恩)의 파병이며, 비로소 우리 군도 자유민주세계를 수호하기 위한 강군으로 성장하였다."며 여론을 호도하였다.압도적 화력으로 쉽게 승리할 것으로 믿었던 미군은 월맹군의 치열한 반격에 고전하게 되고, 이라크 침공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미국의 베트남 참전의 둘러리로서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그나마 민주화가 진행된 오늘날에는 국민의 여론을 의식해 전투병을 파병하지 않았지만, 박정권은 그런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맹호부대(육군)를 긴급 편성하여 파병하였고 청룡부대(해병)까지 파견하였다. 당시에는 학생들에게 단체영화 관람할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영화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대한뉴스'가 방영되었다. 대한뉴스의 머릿기사는 항상 박정희의 동태를 전하는 뉴스로 장식되었고, 그 내용 대부분은 무슨 도로 준공식이나 공장 준공식에서 박정희 부부가 준공테이프를 가위로 절단하는 장면들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보도가 끝나면 이어지는 것이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들의 소식이었는데, "무슨 무슨 전투에서 적을 섬멸하고 승리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베트남전 전사자들의 영결식 장면이 점차 비중을 키워갔고 얼마 후에는 철군 뉴스가 전해 졌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한 것이다. 종신집권을 꿈꾸던 박정희는 '미국의 패배를 베트남 패망'으로 각색하여 자신의 장기집권에 적극 활용하였다. 반공교육을 강화하고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국론분열행위로 몰아붙였다. 장기집권에 위협적 존재였던 김대중을 납치하는가 하면,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해 가기 시작했다. 닉슨의 중국 방문과 '닉슨독트린'으로 시작된 미국 대한 정책의 변화는 미국 역사상 가장 도덕적 정권 이었다고 평가 받는 '지미카터'정권이 들어서면서 더 두드러졌다. 카터 정부는 여러 경로로 박정희의 독재에 경고를 보내왔고, 민주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사랑방 대담과 최초의 반미시위 방학이나 주말에 서울로 진학한 형들이 귀향하면 동내 사랑방은 언제나 활기를 띠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시골 사랑방에서 가장 각광 받는 주제는 대학생 형들의 반유신 시위 참가 무용담이었고, 경찰과 시위대 그리고 시위대를 은근히 편들어주고 수배자를 숨겨주는 주변 상인들의 무용담은 사랑방을 뜨겁게 달구었다. 하지만 당시 충청도는 특유의 미온적 성격 때문인지 격력한 민주화시위가 별로 없었다. 오죽하면 서울의 대학생들이 대전이나 청주의 대학 캠퍼스에 '왕겨'(돼지사료)를 보내왔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 였다. 아마도 민주화 투쟁에 미온적인 충청권 대학생들에게 "너희들은 개. 돼지나 마찬가지.."라는 조롱 이었을 것이다. 대전에서 고교시절을 보내는 우리에게 미온적인 대전 대학생들은 대단히 불만스런 존재였다. 정말 그렇게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해 보일 수 없던 차에 한 호국단 간부가 상기된 표정으로 교실로 뛰어들었다. "야..우리 데모해야 하니까 운동장으로 나가!" '데모'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귀가 확 트였다. 잠시나마 우리는 4.19 혁명을 주도한 선배들의 진정한 후배가 된듯한 기분으로 우쭐함까지 느꼈다. 운동장에 나가니 이미 전교생이 술렁이고 있었고, 앞에는 먼저 나온 학생들이 플레카드를 앞세운 체 운동장을 돌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 구호가 "유신독재 물러가라! 였냐고?" 천 만의 말씀이다. 학생들이 들고 있는 플레카드에는 "청와대 도청 자행한 미국은 즉각 사죄하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고 먼저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외치는 구호 또한 "미국은 사죄하라."였다. 며칠 전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곱게보지 못한 미국의 카터정권이 청와대를 불법 도청한 사실이 밝혀지자 박정희는 미 CIA의 도청을 학생들을 동원하여 규탄하고 나선 것이다.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나니 미리 동원된 기자들이 "이제 다 끝났으니(사진도 찍고 했으니) 교실로 가서 수업하라."는 말을 듣는 순간 학생들은 격분하였다. 어디선가 우리가 "꼭두각시냐 ?"는 외침이 울렸고 다시 시위는 시작되었다. 이제 구호는 ""미국은 사죄하라."에서"우리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정부는 사과하라."로 변질되었다. 형식적으로 시위를 지켜보다 철수하던 전투경찰은 뜻 밖의 사태에 교문을 막아섰지만 성난 학생들의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 결국 교문 기둥이 뿌리채 뽑혀 넘어지고 그 와중에 경찰 몇명과 학생들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했고 경찰에 폭행한 것으로 지목된 학생들이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다행이 사태 자체가 우발적이어서 크게 처벌을 받진 않았지만, 젊은 학생들의 의기가 정권에 의해 결코 길들여지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박정희가 사주한 반미시위..경위가 어쨋거나 내가 최초로 참가하고 목에 피를 토하며 외친 시위였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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