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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13 15:57 수정 : 2007.07.13 16:26

중고교 평준화의 뒷담화

우리가 초등학생시절에는 중학교도 입시가 있었다. 중학교 입시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 몰았다. 두 살 연상인 내 누이는 공부에 열중하지 않았고, 그 결과 중학교 입시에서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경기중학교 같은 명문 학교를 지원한 것도 아니고, 어지간하면 누구나(당시에는 어린이들도 중학교 진학을 위해 새벽까지 입시공부를 했다.) 합격하는 시골 중학교 입시에 낙방한 누이는 이 일로 크게 자존심을 상하게 된다.

결국 후기 입시에 합격하여 통학을 하게 되었는데 누이가 다니게 된 중학교는 우리 집이 위치한 곳에서도 버스를 타고 한참 들어가야 하는 오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급생들 모두가 동네에 있는 중학교에 같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데, 혼자만 다른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그 자체가 누이에겐 고문과 같았다. 누이는 행여 아는 얼굴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는지, 늘 새벽에 등교했고, 밤늦게 귀가했다. 결국 어머니는 교육청 직원들에게 집요한 로비(?)를 벌여 누이를 마을의 중학교로 전학 시켰고 누이의 유배생활은 이렇게 끝났지만 수 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누군가 '후기 중학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내 중학교 입시가 1년 남은 시점에 문교부(교육부)는 중학교 입시 폐지를 전격적으로 결정하였고, 어느 날 갑자기 대한민국 어린이들은 입시지옥에서 해방되었다. 중학교 평준화는 분명 옳은 일이지만 실시 시점과 관련하여 꽤 그럴듯한 소문이 떠돌았는데, “대통령 아들(박지만)이 일류 중학교에 갈 실력이 안 되니까 대통령 체면이 구겨지지 않기 위해서 입시를 폐지했다.” 는 것 이었다.


지독한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중학교 입시는 박지만의 중학교 진학 연도에 맞춰 폐지되었고, 그리고 지만이 고교에 진학하는 해에 맞춰서 전국에서 서울지역만 전격적으로 평준화가 실시되었다. 그 후 지만이 대통령 아들 자격으로 육사에 특례 입학한 사실도 입시제도 변경과 관련하여 많은 뒷담화를 만드는 원인이 된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중학교 입시에서 해방되었다. 그것이 박지만 덕인지 교육정책 덕인지 모르지만 지독하게 잠이 많은 나로서는 밤늦게 까지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중학교무시험 진학이 누구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고교평준화가 서울지역만 실시된 까닭에 지방의 모든 중학생들은 여전히 입시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경기고, 경복고 등 서울의 쟁쟁한 명문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지역 근처의 명문고인 대전고나 청주고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매진해야만 했다.

74년 8.15일

중3 여름 방학 그러니까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을 중계하던 TV에서 느닷없이 총성이 울려나왔다. 화면이 흔들리더니 기어이 방송이 끊겼다. 그리고 몇 분 뒤 기념식은 다시 진행되었고, 이어진 정오 뉴스는 “기념식장에서 대통령에 대한 저격이 있었으며, 영부인 육영수씨가 피격되어 수술을 받고 있다.”는 놀라운 전해주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육영수씨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고, 모든 방송과 매체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체가 올스톱되어 육영수씨의 충격적인 죽음을 비통해하고 애도하였다.

방송과 신문에는 연일 육영수씨와 평소에 접촉이 있었던 인사들이 출연하여 육여사의‘자애롭고 인자한 성품’(한 동안 한나라당의 박근혜가 이러한 육영수의 모습을 벤치마킹 했었다.)을 칭송하였으며, 뉴스와 대담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진혼곡이 방송되었다. 굳이 지인들의 칭송이 아니더라도 육영수씨의 외모나 품행이 당시 국민들에게 대단히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는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세력조차 육영수씨에 대한 비판은 입에 올리는 것을 금기시 할 정도로 그녀는 인기 있는 퍼스트레이디였다.

5일간의 추도기간이 지나자 장례를 위해 육영수씨의 유해는 국화꽃으로 치장한 리무진에 실려 십 수년간 몸담아온 청와대를 떠나게 된다. 청와대 현관을 출발한 운구차는 흐느끼는 직원들을 뒤로 한 채 움직이다가 이윽고 청와대의 정문 앞에 멈추어 선다. 거기에 한 남자가 서 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며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독재자이기도 한 그가 너무도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가 운구차의 뒷덜미에 손을 올려놓은 채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다 뒤 돌아선다. 그리고 행렬은 조용히 청와대를 빠져나간다.

이런 박정희의 모습은‘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초라한 남편의 뒷모습으로 뇌리 속에 각인'되어 오랜 시간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한 연민에 젖어들게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이었다. 이후 내게 전달된 그에 대한 모든 소식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한 남편도 아니며, 엄마 없는 자녀들을 사랑하는 참된 부모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고집스럽고 괴팍하며 잔혹한 독재자로서 자신의 종말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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