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을 벗어나 본 적이 별로 없었던 내게 대전은 매우 번화한 도시였다. 거리에는 늘 사람이 넘쳐났고 시장통에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급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서대전 사거리 근처를 가게 되었는데 그 곳은 별천지였다. 근처에는 큰 섬유공장이 몇개 있었는데 마침 내가 그 곳을 지날 때쯤이 공원들의 근무교대시간이었는지 엄청나게 많은 여공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 동안 변변한 공장 한번 본 적이 없는 내가 넋이 빠져 거리를 바라 보고 있자니 친구 녀석이 어께를 툭 치며 한 마디 던진다. "쟤들 공순이들이야…. 이 근처에는 널린게 공순이니까 그만 침흘려 이녀석아."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부근 공장에서 근무하는 대부분 여공들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하지 못한 우리 또래의 어린 소녀들이었고,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보다 어린 중학생 나이의 여공들도 꽤 있었다는 것 이었다. 나와 절친했던 한 친구는 "개교기념일에 동생 면회 가는 데 같이 가자"며 말을 붙여 왔다. 나는 좀 의아했다. 그와는 상당히 친하게 서로의 집을 오갔기 때문에 면회를 가야할 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친구의 입장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취업한 동생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공장 입구에 들어서니 코를 찌르는 악취에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동생은 자주 만나기 어려운 오빠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어딘지 지쳐 있었다. 고교도 진학하지 못한 어린 동생은 인생을 한참 꽃피워야 할 나이에 가정의 생계를 위해 공장에 취업했고 처음 12년은 얼마간 가계에 도움도 주었지만, 이제는 "생활비와 약값을 쓰고 나면 집에 별로 보태줄 돈이 없다"며 걱정을 하고 있다. 누이의 말에 의하면 "작업장에는 30도가 훨씬 넘는 고온에도 달랑 선풍기 몇대가 돌아가는게 고작" 이라고 한다. 거기다 각종 표백제나 염료 등 화공약품에 노출되어 있으니 "몇년을 근무한 여공들 대부분이 각종 질환에 시달리다 버는 돈 대부분을 약값으로 소진하게 된다"고도 한다. 마른 기침을 콜록이며 이어가는 누이의 말을 들으며 한 없이 갑갑하고 부끄러웠다. 이렇게 기특한 마음을 가지고도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하는 누이들을 '공순이'라며 놀려왔다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YH사태 1970년 한 청년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결한 이후 불기시작한 산업현장의 노동 운동은 가장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격무와 천대, 그리고 산업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공들에게 자각의 계기를 가져다 주었고, 크리스천 아카데미,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지원에 힘입어 활발한 노동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970년 청계피복 노조의 결성에 이어 1972년 동일방직, 원풍모방, 1974년 반도상사, 1975년 YH무역 등으로 노조 결성은 확대되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여공들의 노동환경은 최악이었다. 걸핏하면 선적 일정을 맞춘다는 구실로 밤샘근무를 강요당했고, 휴일에도 연장근무를 해야만 했다. 작업장의 열악한 환경은 각종 재해를 유발시키는 살인적인 노동에도 그들이 손에 쥐는 급여는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했다. YH무역의 여공들은 당시 사회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일 만큼 자신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스스로 개선해 나가기위한 의식과 열정을 지니고 있었고 결속력도 강해 임금 교섭과 근무환경 개선을 조금씩 관철시켜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YH사주인 장용호는 노조가 잘 결성된 YH무역에서 더 이상 빼먹을 건덕지가 없다는 판단이 들자 공장폐쇄를 공고하고 재산을 챙겨 미국으로 줄행랑친다. 공원들은 회사의 공장폐쇄에 반대하며 농성에 돌입하고, 여공들의 농성을 지원하기 위해 농성장을 찾은 재야인사들의 주선에 의해 여공 180명이 신민당사 진입하여 농성을 계속하게 되면서 YH사태는 일약 정치적 현안으로 떠 오르게 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박정희정권은 이른바 '101호 작전'으로 불리는 야만적 탄압을 전격적으로 감행 한다. 1979년 8월 11일 2000여명의 경찰 병력이 신민당사로 난입하여 농성중인 여공들과 신민당 국회의원 그리고 취재기자까지 무차별 폭행하며 진입한지 40분 만에 상황을 종료시켰지만, 이 와중에 농성에 참가했던 김경숙씨(당시 22세)가 사망하게 된다. 생존을 위해 투쟁해온 어린 여공들을 가혹하게 탄압한 YH사태는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으로 이어지고, 김영삼 제명은 다시 부마사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유신체제의 종말을 재촉하게 된다. 하지만 농성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김경숙의 죽음'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 이어진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부마사태,10.26 등 충격적인 정치적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22세 꽃다운 처녀의 비통한 죽음이 크나큰 정치적 사건에 가려 묻혀진 것 처럼, 박정희의 경제개발이란 업적 뒤에는, 비참한 환경에서 착취당한 수 많은 '공순이'와 '공돌이'들, 그리고 베트남 참전 용사들, 독일 파견 간호사와 광부들, 그리고 중동 건설현장 파견 근로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은 여전히 그늘 속에 가려져 있다. 경제개발의 그늘에 감추어진 처절한 희생을 치룬 댓가를 당사자들은 오늘날 누리고 있는가? 아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댓가 대부분이 재벌의 몸집 부풀리기에 사용되었고, 개발의 정보를 선점한 탐욕스런 투기꾼들의 재산 부풀리기와, 부도덕한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비자금으로 지하로 흘러들었다는 사실을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