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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30 18:46 수정 : 2007.07.31 04:40

김병학씨

“조금만 늦었어도 ‘유랑의 한’ 잊혀졌을 뻔”

작곡가 한야꼬브씨와 4년 작업 결실
옛소련 한글학교 교사로 15년 전 이주
이주 1세대 사라져가…“해독 못하기도”

‘우리의 이름은 없어졌다/ 우리의 짧은 성씨만 남았다/ 그러나 옛날부터 우리의/ 매운 음식은 남아 있고/ 할아버지한테 옛날이야기를 물어보니/ 침묵만 지킬 뿐 대답이 없다. ’(고려인 3세 리 스따니슬라브)

1937년 9월부터 1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등 연해주 일대에 살던 20여만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다. 올해가 강제이주 70돌. 이에 맞춘 듯 기념비적인 책이 하나 나왔다. 〈재소 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 Ⅰ·Ⅱ〉(화남). 카자흐스탄 우슈도베에서 시작한 한많은 고려인 70년 유랑생활을 달랜 구전·창작가요 600여곡의 악보와 가사, 출처, 생성 배경, 그리고 옛 사진들을 담았다.

“70돌에 맞춘 건 아니었다. 어쨌든 이주 1세대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들의 노래들을 대부분 수록해서 역사와 발자취를 전하게 된 건 기쁜 일이다. 작업하면서도 아찔한 생각이 들었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잊혀져버렸을 노래들이 많았다.” 현지의 고려인 작곡가 한 야꼬브(54)씨와 직접 노래들을 채록한 편저자 김병학(42)씨. 지난 27일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김씨는 15년째 알마티에 살고 있는 한인 이주민. 91년 광주지역 민간인들이 돈을 모아 옛소련 6개 지역에 한글학교를 만들었는데, 그때 교사로 지원했다. 92년 우슈토베 한글학교 교사가 된 뒤 알마티 고려천산한글학교장, 알마티국립대 한국어과 강사를 거치며 12년간 한글을 가르쳤고, 고려인 한글신문 〈고려일보〉 기자생활도 했다.

“2004년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가요 녹취를 위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를 돌아다녔다.” 그 전에 야꼬브씨가 해 놓은 선행작업이 있었으나 채록한 현지의 고려인들은 대부분 이젠 우리말도 모르고 함경도 사투리에 러시아어까지 섞인 악보들도 읽기 어려워 가사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한 1주일이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야꼬브씨 일을 교정이나 교열 보는 정도로 곁에서 도와주면 될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녹취한 것 풀어쓰고 내용 판독해내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채록 노래들을 기본적으로 수십 번씩은 들었다. 수백 번 들은 것도 있다. 나중에야 알아낸 것도 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다.” 사람들을 수도없이 만났으나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기록으로 남은 노래를 찾아내기 위해 고려인 신문인 “〈레닌기치〉 38년부터 2004년까지 60여년치를 다 뒤졌다.” 그래서 주석을 달고 해제를 붙이고 관련 인물 연보까지 정리했다. 그렇게 해서 ‘필생의 역작’이 됐다.

〈고려신문〉과 현지의 마지막 한글문학평론가 정상진(90)씨, 〈고려일보〉 사진기자로 소련사진작가동맹 회원이었던 안 윅또르(60)씨, 창작문화단체 ‘오그늬람빠’의 최 따찌야나 대표 등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작업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편곡도 하며 악보를 정리한 것은 야꼬브씨다. 2년여의 작업, 야꼬브씨가 일부 진행한 작업기간까지 합하면 4년여의 작업 끝에 책이 만들어졌다. 김씨는 마지막 작업을 위해 지난 2월 귀국해 기획하고 한국 정부의 재정지원도 주선하는 등 물심양면 도와준 김준태 시인, 이 책을 애초에 기획한 한국문학평화포럼(회장 임헌영), 도서출판 화남 쪽과 5개월간 손을 맞췄다.

“이 책 출간 기념 및 수록노래 공연이 오는 10월27일 알마티에서 열린다. 다양한 민족구성이니 각기 다른 민족들 언어로 한두 곡씩 부르도록 해 민족화합을 다질 생각이다.”

아직도 홀로 사는 그는 “돌아와봤자 여기선 내가 할 일이 없다”며 당분간 중앙아시아에서 문화·예술 분야 일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노혜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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