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사업은 순조롭게 운영됐고 두 아이도 잘 자라 걱정이 없던 서씨에게 이민21년만인 1989년 남편의 돌연한 죽음이라는 또다른 역경이 찾아왔다. 경제적으로는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서씨는 남편의 꿈을 잇기 위해 택시 회사 경영을 물려받았다. 서씨가 채택한 경영 비법은 `사랑'이었다. 할아버지 상을 당했다면서 6차례나휴가를 갔던 운전사가 똑같은 핑계로 다시 휴가를 신청했을 때 웃으면서 받아줬고교도소에서 세번째 출소해 다시 찾아온 운전사를 경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채용했다. `한국인 택시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서씨는 지금 9개국 출신의 운전사 30여명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34세의 딸은 인터넷 기업 야후의 변호사로, 33세인 아들은 나사(미국 항공우주국)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올해 나란히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김씨의 미국 생활도 이에 못지 않게 극적이다.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던그는 서울의 주한 미국대사관 운전사로 일하다 1970년 여행경비 한도를 두배나 초과한 `거액' 200달러를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과 하와이를 경유하면서 갖고 있던 돈을 대부분 다 써버린 그에게 남은 돈은 단돈 30센트. 하루 세끼 라면만으로 끼니를 떼어야 했던 그에게 가난보다도 더 큰 어려움은 영주권이 없다는 약점을 잡고 월급을 예사로 떼어먹던 한국인 고용주들이었다. 고리의 부채를 내 처음 차린 사업은 구두 수선가게였다. 처음하는 일이다보니 손가락 뼈가 기계에 딸려 들어가 뼈가 깎이는 고통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씨는 영주권을 얻었고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사(社)에서 운영하던 리무진 업체 운전사로 채용되면서 많은 연예인과 유명인사를 알게 됐다. 한번은 손님으로 탄 유명 배우 워런 비티의 과속 요구를 거절하다 크게 말다툼을 벌였고 이 일로 인해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플레이보이의 운전사로 일하던 중 영화계 거물이며 퀸 마틴 프로덕션의 대표였던 퀸 마틴씨를 알게 됐고 김씨가 무술에 능하다는 말을 들은 그는 김씨를 운전사 겸 보디 가드로 채용했다. 그의 추천으로 TV나 영화에 출연하게 된 김씨는 틈틈이 연예활동을 하는 중에도 프랑스인이 경영하던 가발 수입업체에 취직해 업무를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UCLA) 대학 졸업후 항공사에 근무하고 있던 딸과 함께 가발 수입업체를 시작했다. 김씨의 업체는 지금 연간 2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견실한 업체가 됐다. 경영일선에서 은퇴한 그는 연기와 무술지도, 통역 등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보내고 있으며 90년대 초 2년간 베이징에서 중국어 공부를 한 데 이어 내년 6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 무술과 철학을 다시 배울 예정이다. 이들 입상자와 마찬가지로 자수성가한 교포 기업인인 김대원(49) 사우스폴 사장과 김광원(42) 어게인스트 올 오즈 사장 형제가 설립한 `김씨 재단'은 22일 뉴저지주 포트리 힐튼 호텔에서 시상식을 갖고 수상자들을 격려했다. 옷가게, 야채가게 점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연간 매출 4억5천만달러의 의류업체 경영자가 된 김대원 사장은 "에세이 공모작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아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털어놨다. 두 형제가 5년간 500만달러씩을 출연해 모두 1천만달러의 기금을 조성, 동포 지원 장학사업 등을 벌인다는 목표 아래 현재 310만달러를 확보하고 있는 `김씨 재단'은 에세이 공모 당선작으로 영어 및 한국어 책을 낼 예정이며 해마다 다른 주제로공모 행사도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뉴욕/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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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속에 핀 꽃..“꿈은 이뤄진다” |
1968년 결혼한지 사흘만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온 서영자(여.63)는 인종차별과 재정적 파탄, 남편의 죽음 등 온갖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은 지역에서 존경받는 택시업체 경영자다.
30년전 미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단돈 30센트가 가진 것의 전부였던 김광태(69)씨는 주유소 점원, 구두수선공, 작업장 인부 등 온갖 험한 직업을 거쳐 수백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체 사장이 됐고 은퇴한 뒤에는 영화배우와 무술 지도자 등으로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뉴욕의 한인 비영리단체인 `김씨 재단'이 시행한 에세이 공모에서 당선된 성공교민들의 이야기다.
`좌절과 도전'을 주제로 한 이 에세이 공모의 수상작들은 모두 참담한 실패와 역경으로 점철돼 있어 험난한 초기 이민자들이 겪었던 어려움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에세이 공모에서 1위를 차지한 서씨의 경우 청년다운 자신감 이외에는 아무것도없었던 남편만 믿고 미국길에 올랐지만 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고 특히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인종 차별 분위기를 이겨내는 것이 큰 문제였다.
서씨 부부는 친지에게서 꾼 돈으로 주유소를 인수해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사무실 유리창에 `중국인은 꺼져라'는 낙서를 써놓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 14시간씩 쉬지 않고 일하는 남편에게 주민들은 점점 마음을 돌리기시작했고 작은 택시회사를 인수해 사장이 된 남편은 특유의 뚝심으로 동양인 사장을깔보던 운전사들의 기를 꺾었다.
운전사들이 사장을 얕보고 태업을 일삼자 36시간을 한숨도 자지 않고 일한 것.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사장이 근무중인 것을 본 운전사들은 그 이후에는 완전히 태도가 달라졌다.
택시 사업은 순조롭게 운영됐고 두 아이도 잘 자라 걱정이 없던 서씨에게 이민21년만인 1989년 남편의 돌연한 죽음이라는 또다른 역경이 찾아왔다. 경제적으로는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서씨는 남편의 꿈을 잇기 위해 택시 회사 경영을 물려받았다. 서씨가 채택한 경영 비법은 `사랑'이었다. 할아버지 상을 당했다면서 6차례나휴가를 갔던 운전사가 똑같은 핑계로 다시 휴가를 신청했을 때 웃으면서 받아줬고교도소에서 세번째 출소해 다시 찾아온 운전사를 경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채용했다. `한국인 택시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서씨는 지금 9개국 출신의 운전사 30여명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34세의 딸은 인터넷 기업 야후의 변호사로, 33세인 아들은 나사(미국 항공우주국)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올해 나란히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김씨의 미국 생활도 이에 못지 않게 극적이다.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던그는 서울의 주한 미국대사관 운전사로 일하다 1970년 여행경비 한도를 두배나 초과한 `거액' 200달러를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과 하와이를 경유하면서 갖고 있던 돈을 대부분 다 써버린 그에게 남은 돈은 단돈 30센트. 하루 세끼 라면만으로 끼니를 떼어야 했던 그에게 가난보다도 더 큰 어려움은 영주권이 없다는 약점을 잡고 월급을 예사로 떼어먹던 한국인 고용주들이었다. 고리의 부채를 내 처음 차린 사업은 구두 수선가게였다. 처음하는 일이다보니 손가락 뼈가 기계에 딸려 들어가 뼈가 깎이는 고통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씨는 영주권을 얻었고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사(社)에서 운영하던 리무진 업체 운전사로 채용되면서 많은 연예인과 유명인사를 알게 됐다. 한번은 손님으로 탄 유명 배우 워런 비티의 과속 요구를 거절하다 크게 말다툼을 벌였고 이 일로 인해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플레이보이의 운전사로 일하던 중 영화계 거물이며 퀸 마틴 프로덕션의 대표였던 퀸 마틴씨를 알게 됐고 김씨가 무술에 능하다는 말을 들은 그는 김씨를 운전사 겸 보디 가드로 채용했다. 그의 추천으로 TV나 영화에 출연하게 된 김씨는 틈틈이 연예활동을 하는 중에도 프랑스인이 경영하던 가발 수입업체에 취직해 업무를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UCLA) 대학 졸업후 항공사에 근무하고 있던 딸과 함께 가발 수입업체를 시작했다. 김씨의 업체는 지금 연간 2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견실한 업체가 됐다. 경영일선에서 은퇴한 그는 연기와 무술지도, 통역 등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보내고 있으며 90년대 초 2년간 베이징에서 중국어 공부를 한 데 이어 내년 6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 무술과 철학을 다시 배울 예정이다. 이들 입상자와 마찬가지로 자수성가한 교포 기업인인 김대원(49) 사우스폴 사장과 김광원(42) 어게인스트 올 오즈 사장 형제가 설립한 `김씨 재단'은 22일 뉴저지주 포트리 힐튼 호텔에서 시상식을 갖고 수상자들을 격려했다. 옷가게, 야채가게 점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연간 매출 4억5천만달러의 의류업체 경영자가 된 김대원 사장은 "에세이 공모작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아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털어놨다. 두 형제가 5년간 500만달러씩을 출연해 모두 1천만달러의 기금을 조성, 동포 지원 장학사업 등을 벌인다는 목표 아래 현재 310만달러를 확보하고 있는 `김씨 재단'은 에세이 공모 당선작으로 영어 및 한국어 책을 낼 예정이며 해마다 다른 주제로공모 행사도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뉴욕/연합뉴스)
택시 사업은 순조롭게 운영됐고 두 아이도 잘 자라 걱정이 없던 서씨에게 이민21년만인 1989년 남편의 돌연한 죽음이라는 또다른 역경이 찾아왔다. 경제적으로는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서씨는 남편의 꿈을 잇기 위해 택시 회사 경영을 물려받았다. 서씨가 채택한 경영 비법은 `사랑'이었다. 할아버지 상을 당했다면서 6차례나휴가를 갔던 운전사가 똑같은 핑계로 다시 휴가를 신청했을 때 웃으면서 받아줬고교도소에서 세번째 출소해 다시 찾아온 운전사를 경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채용했다. `한국인 택시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서씨는 지금 9개국 출신의 운전사 30여명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34세의 딸은 인터넷 기업 야후의 변호사로, 33세인 아들은 나사(미국 항공우주국)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올해 나란히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김씨의 미국 생활도 이에 못지 않게 극적이다.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던그는 서울의 주한 미국대사관 운전사로 일하다 1970년 여행경비 한도를 두배나 초과한 `거액' 200달러를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과 하와이를 경유하면서 갖고 있던 돈을 대부분 다 써버린 그에게 남은 돈은 단돈 30센트. 하루 세끼 라면만으로 끼니를 떼어야 했던 그에게 가난보다도 더 큰 어려움은 영주권이 없다는 약점을 잡고 월급을 예사로 떼어먹던 한국인 고용주들이었다. 고리의 부채를 내 처음 차린 사업은 구두 수선가게였다. 처음하는 일이다보니 손가락 뼈가 기계에 딸려 들어가 뼈가 깎이는 고통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씨는 영주권을 얻었고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사(社)에서 운영하던 리무진 업체 운전사로 채용되면서 많은 연예인과 유명인사를 알게 됐다. 한번은 손님으로 탄 유명 배우 워런 비티의 과속 요구를 거절하다 크게 말다툼을 벌였고 이 일로 인해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플레이보이의 운전사로 일하던 중 영화계 거물이며 퀸 마틴 프로덕션의 대표였던 퀸 마틴씨를 알게 됐고 김씨가 무술에 능하다는 말을 들은 그는 김씨를 운전사 겸 보디 가드로 채용했다. 그의 추천으로 TV나 영화에 출연하게 된 김씨는 틈틈이 연예활동을 하는 중에도 프랑스인이 경영하던 가발 수입업체에 취직해 업무를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UCLA) 대학 졸업후 항공사에 근무하고 있던 딸과 함께 가발 수입업체를 시작했다. 김씨의 업체는 지금 연간 2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견실한 업체가 됐다. 경영일선에서 은퇴한 그는 연기와 무술지도, 통역 등으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보내고 있으며 90년대 초 2년간 베이징에서 중국어 공부를 한 데 이어 내년 6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 무술과 철학을 다시 배울 예정이다. 이들 입상자와 마찬가지로 자수성가한 교포 기업인인 김대원(49) 사우스폴 사장과 김광원(42) 어게인스트 올 오즈 사장 형제가 설립한 `김씨 재단'은 22일 뉴저지주 포트리 힐튼 호텔에서 시상식을 갖고 수상자들을 격려했다. 옷가게, 야채가게 점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연간 매출 4억5천만달러의 의류업체 경영자가 된 김대원 사장은 "에세이 공모작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아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털어놨다. 두 형제가 5년간 500만달러씩을 출연해 모두 1천만달러의 기금을 조성, 동포 지원 장학사업 등을 벌인다는 목표 아래 현재 310만달러를 확보하고 있는 `김씨 재단'은 에세이 공모 당선작으로 영어 및 한국어 책을 낼 예정이며 해마다 다른 주제로공모 행사도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뉴욕/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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