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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3 18:53 수정 : 2005.01.23 18:53

23일 오전 경기 평택시 원폭피해자협회 사무실에서 이치바 준꼬(왼쪽)가 원폭피해자 배상판결 2심에서 일부 승소를 얻어낸 변호사들과 함께 원폭피해자들에게 일본 히로시마 법원 판결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평택/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한국인 피폭 위자료' 이끈 일 변호사·활동가
"징용·징병 등 전후보상운동 계속" 밝혀

한국인 원폭 피해자 정상화(82·서울 성북구 길음동)씨는 “귀밑머리 예쁘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아줌마’가 돼서야 오늘 같이 기쁜 날이 왔다”며 웃었다. 정씨 곁을 지키던 ‘한국원폭피해자들을 구원하는 시민의 모임’ 이시바 준코(49·여) 활동가는 그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이시바는 23살 때인 1979년 1월 한국에 있는 피폭자들을 처음 만난 뒤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부채를 갚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돼야 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인 피폭자를 돕는 활동에 나섰다. 이제는 대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아줌마가 된 이시바는 1995년부터 10년 동안 이어진 소송의 ‘일부 승소’ 판결을 들고 22일 한국을 찾았다.

이날 오후 3시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사무실은 일본에서 기쁜 소식을 들고 온 ‘손님’들이 찾아오자 잔치집으로 변했다. 히로시마 고등재판소는 지난 19일 강제로 징용됐다가 히로시마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에서 원폭피해를 당한 이근목(78)씨 등 한국인 40명에게 “한사람에 120만엔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소송 대표 변호사 자이마 히데카즈(56)는 “이번 판결은 일본 기업이 한국 사람들을 강제징용해 괴롭힌 것이 위법한 일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라며 “일본 법원이 늦게나마 과거 청산의 의지를 보여준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법한 강제 징용은 시효가 지났거나 한-일 협정으로 청구권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배상’으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했다. 대신 일본 법원은 일본 정부가 1974년 노동후생성 공중위생국장 ‘통달(지침) 402호’를 통해 한국인 피폭자들의 보상·치료의 길을 막은 데 대해 한 사람당 120만엔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판결이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되면, 소송에 참여한 원고 40명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피폭자 2300명 모두에게 위로금이 지급된다. 소송에 참여한 아다치 지(46) 변호사는 “판결에서 일본 법원이 피해자 보상을 위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며 “판결이 나오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판결이 나오기까지 지난 10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99년 3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는 청구를 기각해 반 세기 동안 맺힌 한국인 피해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았다. 자이마 변호사는 “1심 패소 판결을 들고, 한국인 피해자들을 찾았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인 피해자들은 ‘퀭한 눈’으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일본 변호사들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자”며 손을 잡아줬다. 일본 변호사들은 “힘들지만 그래도 꼭 소송을 진행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힘을 모았고, 10년 만에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 냈다. 소송에 참여했다가 2003년 숨진 김재현씨의 아들 선기(55·서울 성동구 행당동)씨는 “양심있는 일본 변호사들의 작은 노력이 건설적인 한일관계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치바 준코 활동가는 “이번 판결로 진전이 있긴 했지만, 아직 한국인 강제징용과 징병에 대한 ‘배상’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라며 “일본 정부가 잘못을 시인하고 배상에 나설 때까지 꾸준히 전후보상운동을 벌여나가겠다”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소송 도와준 중학교사 나츠하라

"평화 가르치며 일본책임 고민…판결문 받아적은 손 덜덜 떨려

22일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서 만난 나츠하라 노부유키(47·사진) ‘미쓰비시 히로시마 원징용공피폭자재판 지원회’ 활동가는 “히로시마 미쓰비시중공업 피폭자 소송을 진행하며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한국과 일본의 동지들을 만나게 돼 행복했다”며 “이번 판결이 앞으로 일한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나는 히로시마 시립 이츠카이치간논 중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는 교사다. 히로시마는 미국의 원폭 공격을 당한 피해자이자, 대륙 침략 때 한국과 중국을 공격하는 전진기지 구실을 한 가해자다. 아이들에게 ‘평화 교육’을 하면서 가해자로서의 히로시마와 일본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다. 일본이 가해 부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소송을 시작할 때 이길 것으로 봤나?

=그렇지 않다.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피해자 할아버지들의 한을 보고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곧 소송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한 지원회에 참석했다.

-판결에 대한 소감은?

=감격적이다. 1999년 1심 판결이 나왔을 때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짤막하게 판결해 무척 허탈했다. 그러나 2심 판결에서는 재판장이 20분 넘게 장문의 판결문을 읽었다. 원고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일본 정부와 기업의 잘못을 시인하는 내용이었는데, 너무 감격스러워 판결문을 받아적는 손이 덜덜 떨렸다.

-일본 사회의 반응은?

=주요 신문 1면과 사회면에 판결 내용을 자세히 소개했다. 한국인 피폭자들의 피해를 받아들인 획기적인 판결이라는 반응이다. 일본 사회 모두가 놀랐다.

-최근의 한일관계를 어떻게 보나?

=한류로 한국에 대한 일본 사회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과거에 대한 고민 없이 무조건 ‘욘사마’만 좋아하는 풍토가 자리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지만 한류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더 가까워질 것이라 믿는다. 이번 판결도 그런 면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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