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3일 오전 경기 평택시 원폭피해자협회 사무실에서 이치바 준꼬(왼쪽)가 원폭피해자 배상판결 2심에서 일부 승소를 얻어낸 변호사들과 함께 원폭피해자들에게 일본 히로시마 법원 판결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평택/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
'한국인 피폭 위자료' 이끈 일 변호사·활동가
"징용·징병 등 전후보상운동 계속" 밝혀
한국인 원폭 피해자 정상화(82·서울 성북구 길음동)씨는 “귀밑머리 예쁘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아줌마’가 돼서야 오늘 같이 기쁜 날이 왔다”며 웃었다. 정씨 곁을 지키던 ‘한국원폭피해자들을 구원하는 시민의 모임’ 이시바 준코(49·여) 활동가는 그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이시바는 23살 때인 1979년 1월 한국에 있는 피폭자들을 처음 만난 뒤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부채를 갚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돼야 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인 피폭자를 돕는 활동에 나섰다. 이제는 대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아줌마가 된 이시바는 1995년부터 10년 동안 이어진 소송의 ‘일부 승소’ 판결을 들고 22일 한국을 찾았다. 이날 오후 3시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사무실은 일본에서 기쁜 소식을 들고 온 ‘손님’들이 찾아오자 잔치집으로 변했다. 히로시마 고등재판소는 지난 19일 강제로 징용됐다가 히로시마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에서 원폭피해를 당한 이근목(78)씨 등 한국인 40명에게 “한사람에 120만엔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소송 대표 변호사 자이마 히데카즈(56)는 “이번 판결은 일본 기업이 한국 사람들을 강제징용해 괴롭힌 것이 위법한 일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라며 “일본 법원이 늦게나마 과거 청산의 의지를 보여준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법한 강제 징용은 시효가 지났거나 한-일 협정으로 청구권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배상’으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했다. 대신 일본 법원은 일본 정부가 1974년 노동후생성 공중위생국장 ‘통달(지침) 402호’를 통해 한국인 피폭자들의 보상·치료의 길을 막은 데 대해 한 사람당 120만엔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판결이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되면, 소송에 참여한 원고 40명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피폭자 2300명 모두에게 위로금이 지급된다. 소송에 참여한 아다치 지(46) 변호사는 “판결에서 일본 법원이 피해자 보상을 위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며 “판결이 나오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판결이 나오기까지 지난 10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99년 3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는 청구를 기각해 반 세기 동안 맺힌 한국인 피해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았다. 자이마 변호사는 “1심 패소 판결을 들고, 한국인 피해자들을 찾았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인 피해자들은 ‘퀭한 눈’으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일본 변호사들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자”며 손을 잡아줬다. 일본 변호사들은 “힘들지만 그래도 꼭 소송을 진행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힘을 모았고, 10년 만에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 냈다. 소송에 참여했다가 2003년 숨진 김재현씨의 아들 선기(55·서울 성동구 행당동)씨는 “양심있는 일본 변호사들의 작은 노력이 건설적인 한일관계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치바 준코 활동가는 “이번 판결로 진전이 있긴 했지만, 아직 한국인 강제징용과 징병에 대한 ‘배상’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라며 “일본 정부가 잘못을 시인하고 배상에 나설 때까지 꾸준히 전후보상운동을 벌여나가겠다”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소송 도와준 중학교사 나츠하라 "평화 가르치며 일본책임 고민…판결문 받아적은 손 덜덜 떨려
|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