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사·정 만으론 안돼 ‘기타 51%’ 가 나서야
‘기타 여러분.’ 뉴패러다임포럼의 이형모(59) 상임대표에게 이 말은 역설적이었다. 여러분은 ‘기타’가 아니라 ‘주역’을 뜻했다. “사회협약에서 노·사·정은 49% 이하이고, 기타 여러분이 51% 이상일 때 국민적 동의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1997년 불어닥친 구제금융사태 뒤 노·사·정이 한자리에 앉기도 했지만 지금은 갈등과 파행을 겪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노·사·정은 사회적 강자이지 약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노·사·정이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주고받기’를 할 뿐, 정직하게 들여다 보면 전체 사회구성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라고 잘못 인식돼 왔던 ‘기타 여러분’이 노·사·정을 강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사회협약’을 이뤄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과 사람 중심 사회를 위한 2005 희망포럼’(희망포럼)의 상임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열성적으로 ‘뉴패러다임’ 운동을 설파하고 있는 그를 지난 19일 시민의신문사에서 만나 뉴패러다임 운동과 ‘희망제안’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들어봤다. -먼저 희망제안이 나온 배경과 취지를 듣고 싶다. =2002년 신용불량자 문제가 부각됐는데 시민운동에서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신용카드 문제는 작은 것이고, 실업 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3년 3월께부터 세미나를 여러차례 했다. ‘갸륵하다, 그런데 실업은 정부도 못하는데 시민단체가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반응이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9월께 유한킴벌리의 4조2교대에서 보편적 원리를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학습예비조를 두고 평생교육을 한다는 개념이 확 들어왔다. 11월 뉴패러다임포럼이 만들어지고, 12월 국민대토론회를 열었는데 큰 성과를 얻었다. 일자리 창출이 중요하다는 데 공감을 해줬다. 정부도 뉴패러다임센터를 만들어 시범사업을 하기로 했고, ‘사람입국신경쟁력특별위원회’를 만들었지만 그때 깨달은 게 있다. 사회적 협약으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지 않으면 어렵겠다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3국과 아일랜드를 방문해서 평생학습과 사회협약에 대해 물어봤다. 노·사·정만 모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실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노인·농민·여성문제까지 고민해주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시민운동가 열 다섯 분이 인사동에서 모여, 침을 튀기면서 얘기했다. 11차례나 모였고 크리스마스 전후로 의견접근이 이뤄졌다. -희망 제안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과연 실현가능성이 있느냐, 아일랜드 모델이 한국에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의구심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다. =아일랜드는 390만명으로 이뤄진 경제단위여서 설득력이 약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도 벤치마킹을 할 수 없는 모델이라고 했다. 어려운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명예퇴직이나 실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없고, 건강한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하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서비스업은 저부가가치, 시장에서의 지속가능성도 약하다. 하지만 과로를 해소하고 학습체제로 가면 사람들이 지식 근로자가 되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부가가치가 높은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 이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 굴뚝산업 때와는 달리 사회전체가 평생학습 체제로 가야 한다. -뉴패러다임 운동이 유한킴벌리를 모델로 한 것 같다. 일자리가 늘었는데 월급도 늘었다고 해서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유한킴벌리의 특수한 상황일 수도 있다. =특수한 것도 있고 보편적인 것도 있다. 기계가 비싼 장치산업은 효과가 극대화된다. 공장 하나를 더 짓는 대신 사람을 늘려 260일 가동하는 기계를 360일 가동하는 것이다. 기계를 세웠다가 가동했다가 하면 손실이 생기는데 일년 내내 가동하니까 고장도 안 나고 효율도 무섭게 올라간다. 지금 양극화·사회적 고통의 핵심은 고용
노·사·정은 사회적 강자이지 약자 아니야
평생학습체제 이끄는 유한킴벌리가 교훈 -장치산업이 아닌 곳에서는 어떻게 되나? =계산기를 두들겨 보면 알 수 있다. 시설은 그대로 두고 사람을 더 뽑아 가동률을 높이고, 인건비 늘어난 것과 매출, 수익이 늘어난 것을 비교하면 된다. 물론 생산품이 시장에서 모두 소화가 되느냐의 문제는 별개로 남아 있다. -경쟁력을 잃은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면서 실업자들이 양산됐다. 기업이 유지돼야 학습 예비조의 도입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존립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다. 정부가 기업에 돈을 지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경쟁력이 없는 중소기업도 있지만 중국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제조업체들이 있다. 노사분규 때문에 간다고 경제단체들은 말한다. 경제단체들은 3년 무분규선언을 하면 큰 것을 양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많은 제조업이 해외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하청구조, 또는 착취구조에서 중소기업은 일방적으로 희생을 당한다. 이런 시스템에서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든다. =이 부분에서도 사회협약이 중요하다. 한 대기업에서 노사분규로 임금을 올리면 협력업체에 비용이 전가된다. 그런데 몇천개의 협력업체들이 대기업 제품의 질을 확보한다. 대기업한테도 장기적으로 손해다. 대기업이 이윤의 일부를 협력기업의 평생학습을 위해서 투자해야 한다. 대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협약 없이 개별적으로 노·사가 부딪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경제단체들을 만났을 때 희망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을 봤는지 궁금하다. =기본정서는 상호불신이다. 시민단체 대표들이 나서준 것에 감사하다고 했다. 마음 속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노·사·정이 아닌 사람들이 논의에 참여해, 노사정을 겨냥해 상생의 방안을 말하라고 할 때 비로소 얘기가 시작된다. 실업자들이 대기업이나 노조한테 직설적으로 말할 때 그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까? 여기서부터 진솔한 토론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노조 쪽의 반응은 어떻나? 사회협약의 필요성에 동의 하나? =양대 노총 모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다. 특히 민주노총은 노사정위 참가 문제처럼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노사정위와 새로운 사회적 협약기구와의 관계설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의 본분을 넘어서는 문제인 것 같다. 사회적 필요에 따라 조정될 것이다. 아일랜드를 들여다보면, 위기감이 고조됐을 때 문제가 해결된다. 우리는 구제금융 사태를 겪으면서도 위기감이 부족했고, 본질을 통찰하지 못했다. -보수와 진보를 망라해 희망제안에 참여했는데 합의에 이르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내부 토론을 할 때도 한달 가량은 합의가 안 될 정도였다. 시민운동이 주도를 해서 보수와 중도 쪽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빨리 보내라, 읽어보고 전화하겠다’ 그러더니 ‘아, 좋은 거네.’ 이렇게 해서 많은 분들의 서명을 받게 됐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극복해야 한다는 데는 합의가 어렵지 않았다. -최근 여당의 당의장이 희망제안에 나온 것과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다. 여당이나 청와대는 뉴패러다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보나? =고민은 할텐데 정리된 입장은 없는 것 같다. 참여정부 출범 2주년인 2월25일까지가 기회라고 본다.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국정 최고 과제로 삼고 추진하겠다고 밝히면 좋겠다. -사회협약이 아일랜드에서는 법제화로까지 이어지나? 한국에서도 협약이 맺어지면 강제력을 가져야 하나? =당연하다. -그러면 정치권도 움직여야 한다. =사회협약이 만들어지면 일주일 안에 법안을 만들 수 있다. 국민적 합의인데 어떻게 버티겠는가. -청와대가 올해는 경제에 올인하겠다고 했다.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양극화나 사회적 고통의 핵심은 고용이고 일자리다. 기업규제를 완화해 투자활성화로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것은 엉뚱한 얘기다. 대담/김이택 사회부장·정리/황상철 기자·사진/탁기형 기자
![]() |
||||
![]() |
● 인터뷰 뒤안길
재벌 관련사 다니다 몰래 시민운동 첫발
이형모 뉴패러다임포럼 상임대표는 16년 전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1989년 그는 서울 명동에 자리잡은 한 투자금융회사의 영업부장이었다. 상여금 1200%, 한달에 월급을 두번 받는 꼴이었다. 3월께 새문안교회 출신 친구들과 세미나를 열었다. “그때 ‘집은 과연 무엇인가? 삶의 터전이 아니라 투기수단으로 바뀌어 버렸다’는 내용의 토론문을 보고 감동을 받았죠.” 불혹을 넘긴 나이에 “이렇게 살다가 10년이 지나면 퇴직을 하고, 내 인생은 그렇게 끝나는가”하는 자괴감도 밀려왔다고 한다.
이 무렵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출범했고, 그에게 재정위원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그는 ‘비밀 당원’이 됐다. 현직을 고려해 이름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듬해인 90년 2월 서울 여의도에서 2천명의 시민과 함께 임대료 인상 규제를 촉구하는 시위에 참가했다. 그런데 발언을 해야 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그가 ‘대타’로 나섰다. “회사에 발각될까 나서지 않으려고 했는데, 중요하지 않은 순서라고 해서 구호 몇개 외치고 연단에서 내려왔는데 그날 밤 자정뉴스에 나와버렸어요.”
다음날 회사의 감사가 점심을 함께 먹자고 했다. 감사는 “어제 어디 갔느냐”고 물었고, 그는 “여의도 거래처에 갔다”고 둘러댔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주주가 재벌인 회사에서 재벌을 비판하는 시민운동을 용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몇달간 회사 쪽과 승강이를 하다 회사냐 경실련이냐의 갈림길에서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시민운동은 그만두지 못하겠더라고요. 홀딱 반해 미쳐 있었죠.”
이후 그는 경실련 활동과 함께 기독교청년회 총무부장을 맡아 시민단체의 살림살이를 배웠고, 94년 1월부터 시민의신문사 대표로 지금까지 신문사를 경영하고 있다.
|
![]() |
||
![]()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