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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복순 할머니 사망 |
경북 고령 태생으로 목사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6남매와 행복한 나날을보내던 박 할머니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5세되던 해인 1936년. 당시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끌려갔던 아버지가 일본군의눈을 피해 도피하자 가족도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내진 곳이 한 전도사의 집.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하던 박 할머니는여공 모집 공고를 보고 친구들과 함께 한 일본인의 집을 찾았지만 그 것이 위안부라는 악몽의 세월이 시작되는 첫 발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 차리지 못했다.
박 할머니가 끌려간 곳은 머나먼 중국 천진의 일본군 기지 가네야마 부대. 하루15∼20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던 박 할머니는 견디다 못해 친구와 도망치다 친구는 총에 맞아 숨지고 자신은 칼에 가슴을 찔려 중상을 입기도 했다.
하루하루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박 할머니는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에 의지했고낮에는 노역, 밤에는 위안부 생활을 하는 고단한 삶을 7년이나 참고 살아야했다.
1945년 해방직전 24살의 나이로 귀국한 그는 파출부로 하루하루를 버텼으나 29세되던 해 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자궁까지 드러냈고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고안정제에 의존한 채 정신쇠약에 시달리며 악몽을 되새겨야 했다.
위안부임을 숨겼던 박 할머니는 1992년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 일본 총리가 방한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의 대열에 동참했다.
박 할머니는 평소 "당시에는 일본 천황이 시켜서 했다더니 고통받고 있는 지금은 왜 이렇게 버려두고 외면하는 지 모르겠다"고 말해왔다고 한다.
그는 1997년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민간기금을 다른 피해자 6명과 함께 받았지만 일본 정부가 아닌 민간의 돈을 받았다는 데 대해 한동안 가슴앓이를 했다고 한다.
양순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은 "피해 당사자들이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있어 안타깝다"며 "그들이 생존해 있을 때 일본 정부가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유족회는 아시아여성기금 창설을 주도한 이가라시 고조(五十嵐廣三) 전 일본 관방장관이 화환을 보내겠다고 전해왔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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