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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30 18:37 수정 : 2005.01.30 18:37

국립소록도병원 ‘구라탑’ 앞에 세워져 있는 ‘수호원장 동상’ 안내판. 병원이 1996년 펴낸 <소록도 80년사>는 “환자들은 동상 건립을 위해 3개월 분의 노임을 헌납해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학정’ 일제 갱생원장 암살 어느 한센병 환자의 ‘의거’

“너는 환자들에게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

소록도 환자 장기진(82)씨는 국립소록도병원에 설치된 ‘구라탑’(나병을 구원하는 탑)을 가리키며 “바로 저 곳에서 이춘상이 수호 원장을 죽였다”고 말했다. 1942년 6월20일 아침 8시5분께 한센병 환자 이춘상(당시 27)은 ‘보은 감사일’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에서 내려 연단으로 향하던 소록도갱생원(현 국립소록도병원) 수호 마사토 원장의 오른쪽 흉부를 칼로 찔렀다. 칼은 가슴에 깊이 13.5㎝의 상처를 냈고, 원장은 곧 숨졌다.

강제노역·우상화 강요 총독부 국장급 관리 응징
항일운동 행적 재조명 독립유공자 신청등 활발

장씨는 “이를 본 일본인 관리들이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다”며 “벌써 63년이 지난 일인데도 쩌렁쩌렁 울리던 그의 고함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수호 원장은 33년 소록도갱생원장으로 부임한 뒤 환자들에게 △벽돌 굽기 △가마니 짜기 △숯 굽기 등의 고된 노역을 시켰고, 40년 8월20일에는 환자들로부터 거둔 돈으로 자신의 모습을 본뜬 동상(높이 3.3m)을 세워 원성을 사기도 했다.


소록도 환자 유인석(82)씨는 “수호 원장이 매달 20일을 ‘보은 감사일’로 정해 환자 6000여명을 자신의 동상 앞에 모아 놓고 절을 시키곤 했다”며 “원장의 학정이 너무 심해 모두 그의 거사를 반기며 기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는 ‘수호 원장 동상’이라는 표지판이 겨우 남아 그때 사건을 증언할 뿐이다. 표지판에는 “수호 원장이 환자들에게 강제노역, 가혹행위 등을 시키다 환자 이춘상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고 적혀 있다.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보호 단체인 한빛복지협회는 다음달 15일 ‘한센 병력자의 인권·복지실태와 한센특별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이춘상의 행적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토론회를 열 예정이라고 28일 밝혔다. 협회는 이번 행사의 성과물을 모아 올 3~4월께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서를 낼 계획이다. 2003년 소록도 출신의 한 한센 병력자가 이춘상의 서훈 신청을 한 적이 있지만, 공적 자료가 부족해 “행적이 불명확하다”는 판정을 받고 ‘보류’됐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수호 원장은 일제 총독부에서 국장급 지위를 인정받던 고위 관료로 국내에서 이 정도 관리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 것은 이춘상밖에 없다”며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그의 행적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광주지법이 42년 8월20일 내린 1심 판결문(소화17년 형공합 제47호)에는 “(이춘상이) 갱생원 부정을 일반사회에 폭로하여 환자 처우 개혁을 도모할 것을 생각하고 (중략) 재원 환자 6000여명을 구하는 길은 한몸을 희생하여 원장을 죽이는 길밖에 없다고 여겼다”고 범행 동기를 묘사하고 있다. 결국,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대구복심법원(제2심)과 총독부 고등법원(제3심)에서 각각 항고가 기각돼 이듬해 목숨을 잃었다.

임두성 한빛복지협회장은 “이춘상이 한센병 환자가 아닌 정상인이었다면 벌써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졌을 것”이라며 “그가 보여준 살신성인의 자세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우리 항일운동사의 자랑스런 한 페이지”라고 말했다. 소록도/글·사진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소록도 수용 김기현씨의 회상
“벽돌 노역에 이상한 주사 시달려 쩌렁쩌렁한 그의 의기 아직도 생생”

▲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만난 김기현(89·사진)씨가 최근 우홍선 한빛복지협회 본부장에게 이춘상이 수호 마사토 원장을 살해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1일대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만난 김기현(89)씨는 “‘수호 원장을 죽여야 우리가 산다’고 되뇌이던 이춘상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며 “아까운 사람이 죽어 환자들끼리 모여 앉아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이춘상은 어떤 사람이었나?
=경북 성주 사람이라고 들었다. 키가 무척 컸고, 힘이 셌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에 원장 동상 제막식을 앞두고 환자 18명이 모여 신라 이차돈에 관한 연극 준비를 했다. 칼춤을 추는 장면이 있었는데, 갑자기 다가와 그 장면에 자기도 끼워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원장을 죽일 맘을 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3년 전부터 수호 원장의 학정을 자세히 기록해 뒀더라.

-당시 소록도의 상황은?
=하루에 5근짜리 벽돌을 1만1천개씩 구웠다. 일주일이면 7만7천장이다. 한 번에 벽돌 다섯개를 지고 벽돌 굽는 가마에서 선착장까지 2㎞를 꼬박 걸었다. 환자들에게 이상한 주사를 놓았는데, 그 주사를 맞은 사람들이 하루에 5명 꼴로 죽어 나갔다. 가마니를 짜기 싫어 목을 맨 사람도 있다.

-재판 과정은 어땠나?
=판사가 왜 죽였냐고 물으니, 이춘상이 수호 원장의 학정이 심했다며 적어 놓은 죄상을 낱낱히 밝혔다. 일본 판사가 증인으로 불려온 한 한센병 환자에게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그 사람이 병원 직원들의 눈치를 보고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제대로만 증언했어도 사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판사는 사람이 걸어가다 벌레에 물려 죽었으면 벌레도 죽여야 한다는 논리로 사형 선고를 했다. 소록도 감금실에 갇혀 있다가 대구로 가서 교수형을 당했다.

소록도/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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