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1975년 4월8일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은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상고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을 적용한 원심에 잘못이 없다고 판시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 판결로 사형이 확정된 8명에 대해 20시간만에 형을 집행했다. <보도사진연감>에서
2. 73년 8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됐다가 5일 뒤 서울 동교동 집에 버려진 김대중씨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보도사진연감>에서
3. 1967년 검찰이 동백림 사건과 관련해 윤이상씨 등 6명에게 사형을, 이응로 화백 등 4명에게는 무기징역을 구형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인혁당·민청학련 (74년)
유신반대 배후 인혁당 지목
선고 다음날 사형 ‘사법살인’
1974년 4월 ‘긴급조치 4호’ 발표 뒤 유신체제 반대 시위가 거세지는 가운데 대학생들이 뿌린 유인물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중앙정보부는 이를 반국가단체로 몰아 1024명을 조사하고 180명을 구속기소했다.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다.
중정은 이 과정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을 통해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하고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인혁당재건위 관계자 23명 가운데 8명은 국가보안법위반 등 혐의로 사형, 나머지 15명은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 같은해 4월8일 대법원은 도예종, 여정남씨 등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 8명의 상고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했고, 다음날 새벽 전격 사형을 집행했다. 당시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년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보다 10년 앞선 1964년 발표된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 때는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중앙정보부에서 피의자들이 고문을 심하게 당했고,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기소를 포기하고, 검사 3명이 사표를 던져 사건 조작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큰 흐름을 꺾기 위해 고문과 재판기록 날조를 통해 사건을 조작해 ‘사법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각본에 의한 조작”이라고 발표했다.
■ 김대중 납치 (72년)
박정권 정적 제거 음모 전형
정말 이후락 지시였나 의문
1972년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야당지도자 김대중씨는 유신체제가 시작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쳤다. 재미교포들의 반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국민회의(한민통) 결성식을 1주일 앞둔 1973년 8월8일 도쿄 그랜드팔레스 호텔에 묵고 있던 김씨는 반공청년조직 ‘구국동맹행동대’라고 밝힌 괴한 6명에게 납치된다. 오사카항에서 배로 부산항까지 압송된 뒤 8월13일 서울 동교동 자택에 버려졌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하던 일본 경찰청이 납치 장소에서 주일한국대사관 김동운 서기관의 지문을 발견해 관련자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에서 관련 사실을 강력 부인하면서 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외교문제로 번졌다. 이후 한국정부가 김동운 서기관을 해임하고, 김종필 총리가 일본을 사과방문 하면서 두 나라 관계가 회복된다.
80년대 들어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씨가 자신이 김대중씨 납치를 지시했다고 시인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는 지가 의문으로 남아있다.
김대중씨는 당시 오사카항에서 중정 공작선인 용금호에 태워져 부산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괴한들이 자신을 토막내 수장시키려 했으나 미국의 항공기가 나타나 수장을 피할 수 있었다고 증언해 미국이 이 사건을 사전에 알고 도움을 줬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사위는 “우리 현대사 장면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것이 바로 김구, 여운형 암살 등 정적의 납치 살해”라며 “김대중 납치 사건은 권력기관이 정적을 납치, 살해, 실종시킨 사건의 전형이어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동백림(67년)
“유럽유학생 북 지령 받았다”
17명 납치 국제문제 불거져
1967년 7월8일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대남적화공작단을 적발했다며 이른바 ‘동백림 사건’을 발표했다. 화가 이응로씨, 작곡가 윤이상씨, 학계의 황성모씨 등 주로 유럽에서 활약하거나 유학중인 예술인·의사·대학교수 등 194명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벌여 정부 전복을 기도한 혐의로 중앙정보부가 수사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독일 등에서 몰래 체포해오는 바람에 큰 외교 마찰을 빚었다.
중정은 7차례에 걸친 수사결과 발표에서 이들이 1958년 9월부터 1967년 6월 사이 동독주재 북한대사관을 오가며 북한으로부터 교양교육과 지령을 받았고, 일부는 평양을 방문해 밀봉교육을 받은 뒤 공작금을 받아 간첩활동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법원은 1967년 12월13일 국가보안법·반공법 등을 적용해 정규명·조영수씨 등 2명에게 사형, 윤이상씨 등 4명에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등 피고인 34명 모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윤이상씨가 동료 음악가와 국제사회의 문제제기로 2년만에 풀려났고, 70년 12월 사형수들도 석방됐다.
이에 대해서는 이응로씨 등 몇몇 인사들이 동베를린과 북한에서 친지등을 만나고 돌아온 것에 불과한 사건을,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사주를 받는 간첩단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돼 오고 있다.
또 사건 당시 윤이상씨의 변호사였던 하인리히 하노버는 96년 독일 법학전문지 기고에서 “당시 한국 정보부원들이 유럽의 한국인 17명을 한국으로 납치하는 과정에서 서독 정보기관이 협조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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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기폭파 용의자로 붙잡힌 김현희가 대선 전날인 1987년 12월15일 서울로 압송돼 비행기에서 내리고있다. 연합
2.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는 정수장학회 사무실. 황석주 기자 3. 69년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당한 뒤 73년 미국 망명길에 오른 김형욱은 회고록을 펴내고 미국 의회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공격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표적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4. 국가안전기획부가 92년 11월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전국을 돌며 공작장비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정우 기자
■ 대한항공 858기 폭파(87년)
대선 보름전 흔적없이 사라져
주검조차 안나와 공작설 꼬리
1987년 11월29일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떠나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기가 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이다. 당시 안기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바그다드에서 탑승한 특수공작원 김현희와 김승일이 기내에 시한장치가 설치된 ‘라디오 폭탄’을 두고 아부다비에서 내렸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사건 발생 3년만인 90년 3월27일 대법원은 김현희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정부는 보름여만에 “사건이 날조됐다는 사실을 반박할 유일한 생존자인 만큼 살려두는 것이 국익을 위해 유익하다”는 이유로 김현희를 특별 사면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희생자의 주검이나 유품이 발견되지 않았고, △폭파범 김현희의 어릴 적 사진 △동유럽 이동 경로에 관한 김현희의 진술 △폭발물의 성분 등 안기부의 일부 수사 발표가 실제와 달라 숱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사건이 1987년 대선을 불과 보름 앞둔 시점에 발생했기 때문에 ‘정치 공작’의 의혹도 강하게 제기돼, 김현희를 대선 바로 전날인 12월15일 서울로 압송한 것을 두고 대선 후보들 사이에서 격렬한 정치적 논쟁이 붙었다. 실제 당시 민정당의 자체 여론조사에서 11월 하순께 정승화씨의 통일민주당 입당 등으로 인해 김영삼 후보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면서 노태우 후보를 위협했으나 여객기 사건 이후에는 이런 상승세가 꺾이고 노태우 후보의 선두가 확고하게 굳어졌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들은 “당시 수사를 서두르느라 일부 수사 결과가 사실과 다른 점 등 약간의 실수가 있긴 했지만 이 사건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 조작설이 처음 제기된 일본에서는 지난 2002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인 김은혜 납치 사실을 시인한 것을 계기로 조작설이 사그러들었다. 김인현 기자
inhyeon@hani.co.kr
■ 부일장학회·경향신문 강제매각
사유재산 강탈·비판언론 통제
“박 전대통령 작업시지” 증언도

5·16쿠데타 직후 부산지역 실업인 김지태씨가 부일장학회를 정부에 강제 헌납했으며 이 과정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다. 김씨 사망 뒤 유가족들은 “수갑이 채워진 채 군인들에 의해 장학회를 정부에 헌납하도록 강요받았다”며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부일장학회는 헌납과 동시에 5·16 장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2년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한자씩 따 정수장학회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정수장학회는 1백억원대 기본자산에, 문화방송 지분 30%와 부산일보 지분 100%까지 소유하고 있어 총 자산가치는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당시 중정 부산지부장이 회고록에서 ‘사실상 강탈’임을 시사했으며, 당시 헌납과정에 개입한 고원증 예비역 준장(전 문화방송 사장)도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5·16장학회를 설립할 것을 지시해 부산에 내려가 작업을 진행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건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띄었던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을 중앙정보부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2년 뒤인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의 동향 인사에게 신문사를 넘기도록 한 사건이다. 당시 이 사장은 5·16쿠데타에 가담했으나 권력에서 밀려났던 김재춘(3대 중앙정보부장)씨에게 경영권을 넘기려했으나, 김씨가 부하 직원들이었던 중정 요원들로부터 린치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해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과거사위는 “이들 두 사건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중앙정보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순치시키거나, 사유재산을 불법적으로 탈취하는 등 불법적인 경제 개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 김형욱 실종(79년)
‘박정권 치부’ 회고록 앞두고 행불
중정 ‘권력게임 개입’ 드러날듯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씨가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갑자기 행방불명됐다. 1960년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던 김씨는 권력에서 밀려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7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씨는 망명 초기 은둔했으나, 1977년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증언하는 등 반유신 활동에 나서 정부의 미움을 샀다. 이 때문에 그가 실종됐을 때부터 박정희 정권에 의한 납치·살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는 당시 미국을 떠나 파리에 도착한 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키가 큰 동양인과 함께 일주일 동안 호텔·카지노 등에 출입하다 10월 7일 행방불명됐다. 특히, 김씨는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담은 회고록을 두고 중앙정보부와 거래를 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가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중앙정보부가 개입됐다는 의혹이 더욱 짙게 일었다.
실종 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현지 폐차장에서 살해됐다” “중정이 고용한 마피아에 의해 살해됐다” “청와대로 비밀리에 끌려와 지하실에서 총에 맞았다”는 등의 소문이 무성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씨는 10·26 사건으로 사형을 당할 때까지도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주변에 말한 것으로 알려져, 차지철 전 경호실장과 관련됐다는 소문이 강하게 돌았다.
한편, 그가 실종된 뒤인 1982년 3월 궐석재판을 통해 반국가행위자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으나, 96년 위헌 결정으로 무죄가 선고됐다.
과거사위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은 과거 정보기관이 반대세력 탄압에도 나섰지만, 권력자들 사이의 권력게임에도 깊숙히 개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중정의 정치개입 활동 전반을 보여줄 것으로 판단돼 우선 조사대상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이순혁 기자
■ 중부지역당(92년)
간첩포섭 노동당지부 결성 몰아
“증거없다” 판결·고문수사 논란

14대 대선을 두달여 앞둔 1992년 10월 안기부가 “남한에 노동당지부를 결성하고 각계각층의 인물을 포섭해 지하활동을 벌여온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당시 안기부는 북한 대남공작총책 ‘이선실’ 등 북한에서 밀파된 거물급 간첩들의 지휘를 받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하고 산하에 강원·충북·충남 3개 도당을 결성했다며 총책 황인오씨 등 62명을 구속하고 2명을 불구속 입건, 달아난 3백여명을 추적중이라고 발표했다.
구속자 가운데는 전 민중당 공동대표 김낙중씨와 정책위원장 장기표씨 등이 포함됐다. 또 민자당과 국민당은 민주당 김대중 대표의 비서 이근희씨가 군사기밀문서를 유출한 혐의로 구속된 데 대해 책임을 묻고 일부 현역 정치인들이 간첩단과 접촉했다는 정치인 연루설 등을 집중 거론하면서 민주당 쪽을 공격했다. 안기부가 대통령 선거 직전에 사건을 터뜨린 탓에 선거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실체를 과장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특히 야당 정치인들이 ‘이선실’의 실체를 모른채 단순 접촉한 사실을 문제삼아 선거용으로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법원에서는 “관련자들이 결성·가입한 단체는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라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북한 노동당의 지부가 남한 안에 구축됐다기 보다는 자생적인 주사파조직이 북한과 직접적 연계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이선실이 북한 거물인 이선실과 동명이인인지 여부 등도 쟁점이 됐다.
또 구속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민족해방애국전선(민애전)을 무리하게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으로 엮는 수사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며 안기부 수사관 등을 고소했으나 검찰에서 수사관 등이 특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두 기소중지나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12년이 지난 지난해 말 국회에서 이 사건으로 구속됐던 이철우 의원이 조선노동당에 가입했는 지 여부를 놓고 정치권에서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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