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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6 18:15 수정 : 2019.09.26 19:34

고 김수길 선생의 장례는 성균관대 민주동문회장으로 25일 치러졌다.

고 김수길 형을 기리며

민청학련 사건 연루 15년 중형
청계노조 지도위원 등 노동운동
90년대 이후 칩거하며 저술·명상

고 김수길 선생의 장례는 성균관대 민주동문회장으로 25일 치러졌다.

김수길 형이 떠났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습니다. 향년 67세. 예전 같으면 환갑이 넘었으므로 이르지 않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요즘이야 어디 그렇습니까. 아쉽고 또 애석합니다.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1972년 성균관대 행정학과에 입학한 이래 유신체제의 폭압에 맞서 기꺼이 학생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독재정권에 맞서려면 일시적인 이슈 파이팅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각성한 비공식 조직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문제연구회라는 이념써클을 만들어 회장 직을 수행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전국 규모의 광범한 학생층의 단결에도 나섰습니다. 1974년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결성 과정에 성균관대를 대표하여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경찰과 중앙정보부에서 가혹한 고문을 겪어야 했고,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다니던 대학에서는 제적당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고난도 그의 행로를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그는 곧장 노동운동 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청계피복노동조합 지도위원으로서 노동조합 교육 활동에 임했고, 구로공단에서 비공식 조직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김수길 형은 문필가였습니다. 사회과학 관련 집필과 번역, 출판 활동에도 진력했습니다. <이야기 경제학>, <선진 노동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을 저술했고, <경제학원론>, <사회사상사개론>, <동양정치사상사> 등을 번역했습니다. 이 중 몇 권은 정보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가명으로 출간됐습니다.

1990년대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세계사의 뒤틀림이 시작됐습니다. 그가 꿈꾸었고 마음 깊이 찬동했던 소망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생업에 복귀했고, 더러는 바리케이드 건너편으로 투항했습니다. 김수길 형은 다시 시작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는 독서와 명상, 저술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멀었던 것 같습니다. 두문불출이 길어졌습니다. 해가 십여 차례 바뀌었습니다만, 그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김수길 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이 지인들에게 알려진 덕분이었습니다. 병실에서 만난 그는 수척해 보였습니다. 다소 병색이 깃든, 얼굴 색깔이 검은 듯 혹은 노란 듯 어두웠습니다. 하지만 눈길은 여전히 형형했고, 변함없이 달변이었습니다. 폐기물 재처리장에서 일해 왔다고 하더군요. 노임이 나쁘지 않고 근무 시간을 자신이 조정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실행에 옮길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하더군요. 다만 분진이 많은 작업장이라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데, 이를 자주 어겼더니 건강에 이상을 느끼게 되었다 합니다. 시력이 나빠서 항상 안경을 써야 하는데 마스크를 착용하면 으레 습기에 젖은 안경알 탓에 시야가 가리더랍니다. 그게 원인일까요. 결국 급성 폐렴이 그를 쓰러트렸습니다.

김수길 형은 갔습니다.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서 가족도 없고, 남겨놓은 재산도 없습니다. 그뿐인가요.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지만 이름마저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남아있는 이들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모색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해 온 그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언하겠습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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