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낙인 찍어 민간인까지 학살
부친·백부·사촌형제…친인척 8명 희생 대학 졸업뒤 연좌제 쫓겨 일본 밀항
오사카에서 82년부터 ‘서울서림’ 운영
“국회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기대” 그가 내민 명함에는 일본 연락처도 적혀 있다. ‘일본 오사카 서울서림 대표’라고 본업을 소개한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여순항쟁 명예회복 운동에 앞장서게 된 ‘처절한 가족사’부터 털어놓았다. “우리 집안은 ‘여순’ 때 모두 8명이 희생당했어요. 부친과 세째 큰아버지, 고모와 고모부, 사촌형제들이 숨졌지요.” ‘증조부 때부터 정착한 여수 금오도에서 조부는 상당한 자산을 일군 덕분에 4남4녀를 유복하게 키웠다. 특히 부친의 손위형인 세째 큰아버지(이윤기)는 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한 엘리트로 1945년 해방 직후 건준 여수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직후 큰아버지는 부산으로 탈출해 일본 망명을 시도했으나, 50년 6월초 여수경찰서 특별수사대에 붙잡혔다. 함께 부산으로 도피했던 부친 역시 형을 구출하고자 다시 여수로 돌아왔다가 체포됐다. 경찰서 수감중에 6·25가 터졌고, 여수경찰은 바로 다음날 큰아버지를 만성리(여수엑스포 자리) 쪽에서 총살시켜 불태웠고, 부친은 6월30일 여수 앞 바다에 수장시켰다. 사촌형들인, 집안의 장손은 대전 형무소에서, 둘째는 대구형무소에서, 셋째는 지리산 빨치산 투쟁 와중에 모두 숨졌다. 똑똑하기로 소문났던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사촌 형수의 부친도 사건 와중에 죽음을 당했다.’ “8~10살 때 겪은 일이지만 지금도 또렷이 충격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 회장 역시 피해자로서 고국을 떠나 신난고초의 삶을 살아야 했다. “1961년 건국대에 입학해 64년 한일수교회담 반대 ‘6·3시위’에 나섰어요. 수배당했다가 해제되긴 했지만 졸업해서도 ‘여순’ 연좌제 탓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죠. 68년 밀항에 성공해 오사카로 왔는데, 아무 연고도 없고 일본말도 못 하니 초기 4년 정도는 공장 노동을 전전했죠. 불법체류자는 대학 입학도 불가능해서 독학으로 일어를 공부해야 했고요.” 다행히 한국인 2·3세 고학생을 지원하는 재일한국장학회와 인연을 맺은 그는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동포들의 권익보호 활동에 나섰다. 그 덕분에 의사인 재일동포 독지가의 후원으로 1982년 6월3일 ‘서울서점’을 열 수 있었다. “대학·언론사·연구기관 등에 한국 관련 자료를 제공했고, 도서관식으로 누구나 와서 책을 열람할 수 있게 운영했어요. <아사히>를 비롯한 일본 주요 언론에서 ‘첫 한국 전문 서점’으로 소개되기도 했죠.” 그는 83년에야 여수에 남아 있던 어머니를 일본으로 초청할 여유가 생겼다. 29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수시로 경찰에 끌려가는 고초를 겪으며 홀로 키운 외아들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던 어머니와 15년 만에 상봉한 것이었다. 서울서림은 차츰 국내외에 알려져 정경모, 리영희, 백낙청, 황석영 선생을 비롯한 진보 지식인과 민주 인사들의 ‘오사카 사랑방’으로 자리를 잡았다. 1995년 이 회장은 27년만에 한국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문민정부 1호 귀국자로 알고 있지요.” 2년 전 아들에게 서점 운영을 물려주고 은퇴한 이 회장은 지난해 ‘여순항쟁 70주기 기념식’ 참석을 계기로 뒤늦게 유족회 활동에 합류했다. “어느덧 팔순을 앞둔 나를 포함해 고령화된 유족들을 보면서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절박함을 느꼈어요. 수시로 비행기를 타고 오가는 일이 만만치는 않지만 살아남은 세대의 마지막 숙제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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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18일 5·18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린 여순항쟁 71주년 서울추모문화제 추진위원회’ 발족식. 앞줄 오른쪽 다섯째가 이자훈 서울유족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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