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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7 19:25 수정 : 2005.02.07 19:25

경기가 나빠지면서 재래시장에는 ‘명절 대목’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있다. 어깨를 부딪쳐야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 만큼 손님들로 북적거리던 골목엔 찾아오는 손님보다 상인의 수가 더 많고, 팔려나가 손님들의 차에 실려야 할 과일 상자의 수보다 가게 안쪽에 쌓아둔 과일상자의 수가 훨씬 더 많은, 평상시보다도 더 못한 대목이 요즈음 재래시장의 명절 대목이다.

“설을 앞두고 과일과 생선 같은 제수용품값의 오름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부도 설 물가 잡기에 나섰습니다. 설날이 성큼 다가왔지만 장을 보는 주부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해마다 명절만 되면 똑같이 반복되는 말이다. IMF 이후로는 더 심각하게 가슴에 와닿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늘 반복되는 말인데도 명절 대목을 앞두고 TV나 신문에서 과일값이 오른다는 보도를 들을 때면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편치가 않다.

내가 청과물 도매시장의 한 점포 앞에 사과나 배 상자들을 주욱 늘어놓고 과일을 팔기 시작했던 것은 1999년이었다. 그땐 그래도 재래시장에 장을 보러 나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불경기라지만 명절 대목은 평상시와는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주차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서로 싸우는 사람들, 저 앞 가게에서는 4다이 사과 한 상자가 2만원이라는데 여기는 왜 3만원이냐, 물건값을 흥정하느라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 안 사고 가도 그만이지만 일단 들어왔으니까 날도 추운데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슈, 어이, 여기 커피 한잔! 가게에서 달려나와 지나가는 커피 장수를 소리쳐 부르는 아줌마, 빵빵! 독산동에 배달 갈 물건 빨리 안 싣고 뭐 해? 노련한 솜씨로 비좁은 가게 앞에 트럭을 갖다대며 성화를 해대는 트럭 기사…. 재래시장은 일부러 과일을 사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로 모처럼 활기가 돌곤 했다.

밑지는지 남는지 그거야 대목이 끝나고 계산기 두드려봐야 알 일이다. 하지만 일단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니 신바람이 절로 난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에 “아! 이게 바로 대목이구나! 대목 장사 잘해서 봄이 올 때까지 이 겨울을 어떻게든 잘 버텨봐야지.” 가게마다 내다 건 알전구들처럼 희망으로 환하게 빛나는 상인들의 얼굴이 있는 곳, 내가 아는, 명절을 앞둔 재래시장의 풍경은 정말 그랬다.

그러나 경기가 나빠지면서 재래시장에는 ‘명절 대목’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있다. 어깨를 부딪쳐야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 만큼 손님들로 북적거리던 골목엔 찾아오는 손님보다 상인의 수가 더 많고, 팔려나가 손님들의 차에 실려야 할 과일 상자의 수보다 가게 안쪽에 쌓아둔 과일상자의 수가 훨씬 더 많은, 평상시보다도 더 못한 대목이 요즈음 재래시장의 명절 대목이다.

2002년에는 설을 앞두고 이런 일도 있었다. “배값과 사과값이 너무 비싸서 서민들은 차례상에 배 하나 올릴 엄두도 못 낼 정도다”라는 뉴스보도가 흘러나온 것이다. 그러자 차라리 배나 사과 안 먹고 말지, 하며 많은 사람들이 과일 대신 한과나 향수, 양주 등을 선물했다.


아니, 과일값이 정말 그렇게 비싼 거야? 향수나 양주보다도 더?

내가 알기론 우리 가게를 비롯해 이웃 점포들도 대목을 보겠다고 물건을 잔뜩 사두었지만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평상시보다도 더 싼값에 배나 사과를 팔고 있었다. 과일은 썩기 때문이다. 밑지고라도 일단은 팔아야 하기 때문에 대목이라도 크게 비싼 값은 아니었다. 문제는, 백화점과 재래시장의 가격 차이었다. 똑같은 과일이라도 재래시장에서 파는 과일과 백화점에서 파는 과일은 그 가격이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명절을 앞두고 많은 이들은 백화점을 찾는다. 그곳에서 한번 보고 “아, 과일값이 이렇게 비싸구나!” 생각하게 되면 재래시장엔 아예 와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뭐, 이상은 어디까지나 재래시장에 애착을 갖고 있는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바람을 한 가지 더 말해 본다면, 명절은 명절이 아닌가. 주머니가 텅 비다 보니 차례상에 사과 한 톨 달랑 올려놓고 보내야 하는 명절이래도, 명절의 참맛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정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굳이 뭘 사지 않더라도 그냥 한번 아이들 손잡고 나와 시장 골목을 걸어다니며 물건값 흥정도 해보고, 누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면 인상도 좀 써보고, 좋든 싫든 그렇게 사람과 부대끼고 사람과 함께하는 명절의 풍경을, 이번 설에는 꼭 다시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명랑/ 소설가 market297@yahoo.co.kr 1973년생. 소설집 <삼오식당>, 장편소설 <나의 이복형제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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