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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7 19:29 수정 : 2005.02.07 19:29

‘천지인’방식을 채택한 삼성전자 애니콜(왼쪽)과 ‘나랏글’방식을 채택한 LG전자 싸이언. 두 입력방식 모두 불편하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삼성·LG, 2파전 속 개인 특허출원 활발…소비자 편의 위해 표준화 시급

‘88125 4221 55211’, ‘8*32 133* 4339’, ‘0#32 133# 5339’.

갑자기 웬 암호 같은 숫자놀음이냐고? 삼성전자와 LG전자, 모토로라의 휴대폰으로 각각 ‘한겨레’란 단어를 입력하기 위해 누른 버튼들이다. 이처럼 국내에선 각 단말기 제조사마다 한글문자 입력방식이 제각각이다. 잘 알려진 대로, 삼성전자는 자체 개발한 ‘천지인’ 방식으로, LG전자는 언어과학이 개발한 ‘나랏글’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팬택계열(한글사랑)이나 SK텔레텍(SKY1, 2) 등도 별도의 입력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업체별로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입력방식을 개발·채택하는 것을 두고 누가 뭐라고 할까.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얘기가 다르다. 새 휴대폰을 사려 할 때 다른 제조사의 단말기를 선택할 경우, 입력방식을 다시 익혀야 하는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표적인 두 입력방식인 천지인과 나랏글이 비효율적이고 불편하다는 문제가 끊이지 않고 제기되면서, 이 참에 편리하고 효율적인 입력방식을 채택해 표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방향키로 입력, 필기방식 모방 등 기발

주요 단말기 제조업체들이 자체 입력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특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1998년, 자사 개발팀 직원으로 천지인 방식을 개발한 최인철씨로부터 특허권을 양도받아 등록을 마쳤다. LG전자도 벤처기업인 언어과학이 99년 11월 특허출원한 나랏글 방식에 대한 사용권을 10억원을 주고 통째로 사들였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가 나랏글 방식을, LG전자가 천지인 방식을 채택하려면 상대방에게 별도의 특허료를 지불해야 한다. 제조업체 입장에선 특허권을 쥔 방식을 두고 굳이 돈을 지불하며 다른 방식을 채택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비자의 편의성은 무시된다. 원하는 기능이나 디자인 못지않게 한글 입력방식은 단말기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특히 문자메시지 입력 속도가 빠른 ‘엄지족’들에겐 새 입력방식을 처음부터 익히는 것이 귀찮을 뿐더러 쉽지도 않다.


게다가 천지인과 나랏글 방식이 불편하다는 지적도 관련 개발자들을 통해 여러 차례 제기됐다. 삼성전자의 천지인은 직관적이고 한글창제 원리에 부합하는 효과적인 입력방식으로 꼽힌다. 하지만 천지인 방식은 같은 자음이나 같은 키에 배정된 다른 자음을 연속으로 입력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예컨대 ‘안녕’이나 ‘신랑’과 같은 글자를 쓰려면 ‘안’의 받침 ㄴ을 입력한 뒤 1초 안팎을 기다렸다 ‘녕’의 ㄴ을 입력하거나, ‘안’을 입력하고 이동버튼을 눌러 옆 칸으로 커서를 옮긴 뒤 ‘녕’을 입력해야 한다. LG전자의 나랏글 방식은 이처럼 자음끼리 충돌을 일으키는 일은 없지만, 자모변환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한글 입력시 *나 # 버튼을 쉼 없이 눌러대야 한다.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개인 개발자들을 중심으로 보다 편하고 쉬운 한글 입력방식을 고안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가 이뤄졌다. 지금까지 한글 입력방식에 관한 특허출원만 300건이 넘을 정도다.

새 방식을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공통된 방향은 대략 3가지다. △기존 방식보다 쉽고 편리하게 입력하며 △끊김 없이 연속으로 글자를 입력해야 하고 △버튼을 누르는 횟수를 지금보다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월24일 SL소프트 www.slsoft.net가 내놓은 ‘0.1초’는 끊김 없이 한글을 입력할 수 있도록 자판 배열을 바꾼 새 입력방식이다. ‘2’와 ‘0’번 버튼의 특수키를 이용해 ㅂ, ㄷ, ㅌ, ㅎ 등 여러 획의 자음뿐 아니라 ㅃ, ㅉ, ㄸ 등 쌍자음까지 손쉽게 입력할 수 있도록 했다. 박주연 SL소프트 사장은 “연세대학교 휴먼커뮤니케이션랩의 실험 결과, 24글자를 입력할 경우 삼성전자나 LG전자 방식보다 평균 1~6초 빨랐으며 장문을 입력할수록 격차는 더욱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또한 연속 쓰기가 가능하므로 글자의 받침을 잘못 입력해 ‘취소’ 버튼을 누를 경우 글자 전체가 아니라 해당 받침만 삭제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인타이드 www.3x4.org의 ‘쉬운글’은 실제 필기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온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ㄱ을 입력하려면 휴대폰 자판의 1, 2, 5번을 차례로 누르는 식이다. 특히 쉬운글은 기존 천지인이나 나랏글 방식과 함께 단말기 입력방식을 복수로 지정할 수 있어, 현재 통용되는 삼성전자나 LG전자 등의 단말기에 추가해 사용 가능하다.

자·모음 입력버튼을 아예 없앤 방식도 눈에 띈다. 클러드 www.clurd.com의 ‘클러드’(C.L.U.R.D)는 휴대폰에 달린 중앙(Center), 좌(Left), 상(Up), 우(Right), 하(Down) 등 5개 버튼만으로 한글·영어·중국어 및 특수문자를 입력할 수 있다. ‘클러드’란 이름도 각 키의 영문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5개의 버튼만 사용하므로 엄지손가락만으로도 조작 가능하며, 좁은 공간에서도 효율적으로 키를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실제 이 제품은 최근 국내 유명 MP3 플레이어 제조업체와 사용 계약까지 맺고 최종 발표를 앞둔 상태다. 기존 MP3 플레이어의 재생·앞·뒤·정지 등의 버튼을 그대로 쓸 수 있어, 별도의 입력자판을 추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클러드는 SK텔레콤 이용자면 누구나 무선인터넷에 접속해 소프트웨어 방식으로 휴대폰에 내려받아 쓸 수 있다. 지현진 클러드 사장은 “1월 말 현재 3천여명의 이용자가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사용하고 있으며, 대부분 빠르고 편리하다는 반응이다”라고 소개했다.

국내에서 이런 식으로 개인 또는 소기업이 개발한 입력방식이 상용화된 사례만도 10여건에 이른다. 팬택계열이 채택한 ‘한글사랑’은 휴대폰 결제 전문 업체 다날 www.danal.co.kr이, VK의 ‘한돌코드’는 한돌정보 www.hdcode.com가 개발·공급한 것이며, 모비언스 www.mobience.com, 이지패드 www.ezpad.co.kr 등도 이미 자체 한글 입력방식의 공급계약을 맺는 등 상용화에 들어갔다.

업계 이해 충돌로 2차례 표준화 논의 무산

보다 편리한 한글 입력방식이 속속 개발되면서, 휴대폰 한글 입력방식을 표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동통신사업자·단말기 제조사·연구소 등이 참여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내 ‘무선인터넷 표준화 포럼’이 지난 2001년, 휴대폰과 가정용 전화기를 포함한 한글 입력방식의 표준화를 시도한 바 있었다. 하지만 관련 업체 간 이해관계가 첨예한 탓에 한쪽 방식의 손을 들어줄 수 없어 난항을 거듭하다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지난해 말에는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가 일부 개발자들의 민원에 따라 표준화 작업을 재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업체가 제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탓에 논의 끝에 표준화 작업을 중단키로 결정하고 말았다.

TTA 정보통신팀 오구영 과장은 “현행 법으로는 표준안을 마련한다 해도 단말기 제조업체에 이를 강요할 권한이 없다”며 “표준화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표준안을 만들 수도 없고 강제로 보급할 방법도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결국 칼자루는 단말기시장의 1, 2위를 차지한 삼성-LG전자가 쥐고 있다. 하지만 국내 시장점유율 1위인 삼성전자는 무선인터넷 표준화 포럼의 표준화 작업에도 참여하지 않는 등 소극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미 상당수 이용자가 천지인 방식에 ‘중독’된 마당에 굳이 새 방식을 고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11월, 삼성전자를 상대로 천지인 방식 특허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던 조관현씨측은 천지인 방식을 채택한 단말기 1대당 가치를 3천원으로 책정했다. 이를 기준으로 단순계산을 해본다면, 올해 상반기까지 삼성전자가 천지인 방식으로 챙긴 몫은 ‘3억대×3천원=9천억원’인 셈이다. 적잖은 수익이 보장된 한글 입력방식을 삼성전자가 ‘애써’ 포기할 이유는 없다.

삼성전자 직원으로 천지인 방식을 개발했던 UI포럼 연구회 www.seri.org/forum/chunjiin의 최인철 고문은 “결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표준화는 반드시 필요하며, 대기업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은 정부밖에 없다”는 것이다. 업체 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것도 정부의 몫이다. “현재 등록된 한글 입력방식 관련 특허를 정부 예산으로 사들인 다음, 표준화 작업을 진행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최 고문은 지적했다.

한글 입력방식의 표준화는 비단 휴대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유비쿼터스 시대를 맞아 다양한 정보기기에 한글 입력방식이 덧붙여지고 있다. 여러 종류의 가전제품과 PC를 모두 조정할 수 있는 ‘만능리모컨’의 숫자판에도 한글 입력방식은 필수적이다. 요즘엔 가정 내 유선전화기에도 LCD화면이 부착돼, 발신자 표시와 전화번호부는 물론 동네 중국음식점이나 주유소 등 생활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 PDA나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 디지털 카메라나 캠코더 등 입력장치가 필요한 모든 기기에 한글 입력 자판이 내장될 전망이다. 아직도 표준화는 늦지 않았다.

이희욱 기자 asadal@economy21.co.kr
미래를 여는 한겨레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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