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30 13:42
수정 : 2005.05.30 13:42
지난 24일 충북 청주의 모 대학 대자보에는 학내 성폭력과 관련한 학교 당국의 미온적 대처를 비난하는 글이 나붙었다.
성폭력 가해 교수들에 대한 학교측의 솜방망이 징계를 질타하며 `총장과의 맞짱 토론'을 제의하고 나선 것은 이 대학의 한 교수였다. 대학가에서는 이례적으로 교수가 교수들의 성 폭력 문제를 거론하고 나서면서 청주지역 시민단체들이 `총장 퇴진'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이 대자보는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도대체 이 대학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시간 강사의 성 희롱 문제가 불거지면서 학교 당국은 "이 참에 학내 성 폭력 문제를 근절하는 계기로 삼자"며 성폭력상담소를 통해 전면적인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NGO 특성화 대학으로 거듭나려는 학교로서는 자율적인 학내 성 폭력 근절 노력이 학교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성폭력 상담소는 600여명의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설문조사와 면담 등을 통해 학내 성폭력 실태 조사를 벌였다. 학내 성폭력 문제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막상 뚜껑이 열리자 학교측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40여명의 학생들이 교수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했으며 강의 시간의 가벼운 성적 농담부터 교수 연구실에서의 심각한 성추행까지 숨겨졌던 치부가 속속 드러났다.
학교측은 적잖이 당황했고 가해 교수들에 대한 조치를 놓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재발 방지를 위한 강력한 징계를 요구하는 교수들과 학교 이미지 손상 등을 고려해야한다는 교수들로 나뉘어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학교측은 후자를 선택했다. 성폭력상담소가 정도가 심하다며 징계 요구를 한 5명의 교수에 대해 경고를 내리고 추가 조사후 징계를 권고한 3명의 교수들에게는 주의 조치가 내려졌다.
학교측이 내린 조치라고는 징계 요구가 올라온 5명의 교수 가운데 1명은 안식년제를 1년 앞당기도록 하고 다른 1명은 3개월간의 병가를 내도록 한 것이 고작이었다. 징계를 요구했던 교수들은 "오히려 면죄부만 준 셈"이라며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런 와중에 성폭력상담소장과 보직교수 2명이 보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학교측은 더 이상 재론하지 않았고 학교 구성원들 사이에 `지나간 일'로 묻혀지려던 이 문제는 이번에 `교수 대자보' 부착으로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 교수는 "가해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채 피해 학생들의 신원만 가해자들에게 공개돼 오히려 이들이 핍박을 받고 있다"며 "성폭력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총장이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 당국은 당시의 조치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학교 관계자는 "징계위에 회부할 경우 피해 학생과의 대질 심문 등을 거쳐야 하는데 피해 학생을 2번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징계를 내려봤자 정직 3개월밖에 내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 데 피해 학생에게는 더 심한 피해가 갈 수있어 징계가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학내 성 폭력 문제에 자발적으로 나섰던 좋은 취지는 묻힌 채 `성폭력 학교'로 낙인 찍힐 경우 학교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도 걱정이 돼 학교구성원들간 충분한 토론을 거쳐 취해진 조치"라며 "실질적인 징계는 없었지만 이미 학교 구성원들과 교수 사이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징계를 하지 않은 데 대해 "학교 외부의 판단 기준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교측은 이 교수의 대자보를 계기로 시민사회단체가 이를 쟁점화하고 나서면서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미 매듭지어진 일"이라던 종전의 입장에서 "지역사회 여론을 살핀 뒤 공감할 수 있는 조치를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자율적으로 학내 성폭력을 퇴치하겠다며 의욕을 보이다 용두사미가 되는 바람에 구성원간 갈등은 물론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게 된 학교측이 이번에 어떤 결론을 끌어낼 지 다음달 9일로 예정된 학교 구성원 대책회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청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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