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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7 16:09 수정 : 2007.06.27 18:05

영화 <빈집>

[매거진 Esc]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빈집>(2004)

태석(재희)은 주소가 없다. 빈집을 골라 문을 따고 들어가 밥을 먹고 몸을 씻고 잠을 잔다. 야무진 손끝을 가진 이 청년은 주인 없는 집의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하고 마른 화초에 물을 주고 때묻은 옷가지를 빨래판에 빤다. 숨진 독거 노인의 시신마저 공들여 염한다. 더럽혀진 것, 죽은 것, 고장 난 것을 보살피는 노동을 통해 태석은 고작 하룻밤 머무른 집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다. 태석이 선택한 삶은, 집이 인간 살림의 요람이 아니라 재산으로 취급되고 급기야 집이 거꾸로 인간을 소유하는 현실을 향한 환상적인 역공이다.

영화 <빈집>에 나오는 여섯 채의 집은 그대로 영화의 장(章)을 이룬다. 영화 속에서 태석이 몰래 문을 열고 들어간 두 번째 집인 평창동의 화려한 저택은 ‘빈집’처럼 보였지만 사실 빈집이 아니다. 거기에는 한 여자가 구석에 웅크려 숨죽여 울고 있다. 기묘한 침입자의 행동거지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 선화(이승연)는 태석의 동행이 되기로 결정한다. 시종 대화 없는 두 남녀는 집의 감식자가 된다. 영화 속의 다섯 번째 집인 축대 높은 한옥에 들어선 태석과 선화는 할 일이 없다고 느낀다. 그 집은 고장 나거나 상한 데가 없다. 세심하게 건사되고 외부와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공간에서 둘은 그저 차를 마시고 편히 쉰다. 그리고 탁자 밑으로 서로의 발을 포갠다. 벽에 걸린 집주인 부부의 사진이 태석과 선화를 잡은 프레임에 온화하게 끼어든다.

김기덕 감독은 인터뷰에서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밀도다. 그 밀도가 가장 완벽한 곳은 한옥이다. 한옥은 꽉 찬 듯하지만 공기가 살아 있고 숨쉴 수 있는 공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한옥이 무조건 ‘해방’을 약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한옥이 김기덕 감독과 지금의 우리에게 매혹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한옥이 우리 시대에 결핍된, 언어로 붙잡기 힘든 가치를 견고한 볼륨으로 쌓아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찰은 태석을 구속하고 선화를 남편에게 돌려보낸다. 헤어진 채로 둘은 더 어려운 과제-비어 있지 않은 집에 들어가는 법-에 도전한다. 감옥의 태석이 사람들의 180도 시야 밖에서 움직이는 기교를 단련하는 동안 선화는 어디서든 자아를 지키는 법을 익힌다. 여자가 먼저 한옥을 다시 찾는다.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어리둥절한 주인에게 목례한 선화는 천연스레 대청마루의 긴 의자에 올라 단잠에 빠진다. 집이 특별한 건 오직 거기 사는 사람들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선화의 잠이 혼곤하고 아무도 해치지 않을 것임을 이해한 주인 부부는 선화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하긴, 그들은 애초에 대문도 걸지 않았다. 이 집의 ‘재산’은 외부자가 들어온다고 훼손되거나 도둑이 든다고 훔쳐 갈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석 역시 얼마 후 같은 자리에서 쉰다.

<빈집>은 육신을 지우지 않으면 행복하기 힘들 거라고 내심 여기는 슬픈 영화이기도 하다. 낙원 같은 한옥 공간에서 주인공들이 할 수 있는 건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것뿐이다. 위대한 영화가 흔히 그렇듯 <빈집>에서 구체적 사물과 보편적 관념은 구별되지 않는다. <빈집>은 ‘비움’을 그리워하는 영화다.

<씨네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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