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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여권의 표지와 속지 / 한나라의 여권이라도 일반용·외교관용 등 소지자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여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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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외교통상부 전시장에서 만난 스위스·포르투갈·쿠웨이트·대만의 이색 여권들
여권은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다. 몸에서 떼지 말아야 할 ‘여행 소지품 1호’지만, 공항 출입국심사대 앞에서 여권을 꺼내는 순간 누구나 긴장한다. 게다가 탁한 녹색 바탕에 뭉툭한 금박 글씨를 박은 디자인은 군부통치 시대처럼 권위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여권 세계에서도 새바람이 불고 있다. 여권이 힘을 뺀 것이다. 2003년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예쁜 여권, 스위스 여권이 화제를 불러일으킨 뒤부터다. 그 뒤 네덜란드가 새로 디자인한 여권을 내놓았고, 한국도 이에 뛰어들었다. 디자이너 로저 펀드를 칭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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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 여권 / 몽골여권 / 루마니아 여권 / 우크라이나 여권 / 포르투갈 여권 / 터키 여권 (위 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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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청 뒤 외교통상부 여권과 민원실에서 세계 각국의 여권 표지를 둘러볼 수 있다. 각 나라가 여권의 디자인을 바꾸면 수교국에게 샘플을 보내주는 게 관례인데, 외교통상부가 이것들을 모아 전시한 것. 유럽의 여권들이 제법 현대적이다. 포르투갈 여권은 앞 표지 뒷면에 배를 끌고 가는 여인들의 그림으로 한 면을 채웠다. 바티칸 여권은 가죽 장정이며, 일반적인 크기인 9㎝×12.5㎝보다 크다. 가로 세로 10㎝×15㎝. 이색적인 여권들도 보인다. 쿠웨이트 여권은 세로쓰기 책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긴다. 우크라이나 여권의 표지엔 아예 로마자가 병기돼 있지 않다. 출입국 심사요원들이 순간 멈칫할 것 같다. 중국과 대만의 여권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중국 것 표지에는 천안문이, 대만 여권 표지에는 태양(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에 나오는 상징물)이 보인다. 대만 여권의 속지에는 저어새(black sponnbill)가 그려져 있는데, 쪽마다 마릿수와 동작이 다르다. 30여 쪽을 주르륵 넘기면, 마치 저어새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난 2월 외교통상부, 문화관광부의 실무자와 디자인 전문가 등이 모인 ‘여권디자인 개선위원회’가 발족했다. 여권을 친근하게 개선한다는 방향은 공감하지만, 각론에는 이견이 있다.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여권 표지 가운데 있는 ‘나라 문장’. 1970년대 대통령령에 따라 규정된 오각형 무궁화 문장이 현대적 감각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 때문이다. 외교통상부는 문장이 작게라도 들어가길 원하고 있다. 디자인개선위 발족, 나라문양 논란 홍석일 연세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는 “문장은 주로 왕실을 계승한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상징물로 사용된다”며 “하지만 한국은 조선 왕조를 계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의 시각적 상징물도 두드러진 게 없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현대적 감각을 반영한 나라 문장을 새로 만들어도 괜찮겠지만,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했다. 최근 10명의 디자이너를 선정한 여권디자인 개선위원회는 이들에게 새 여권 디자인을 의뢰할 예정이다. 위원회는 이들이 제출한 작품 가운데 후보작 셋을 선정해 집중 심의한다. 올해 말 이 가운데 최종안이 선정돼, 이르면 내년 말 발급되는 전자여권에 적용된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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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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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여권은 한 권의 그림역사책 그동안 스위스가 ‘예쁜 여권’의 최강자였다면, 요즈음은 네덜란드가 그 뒤를 이어받고 있다. 네덜란드는 지난해 새 여권을 제작했다. 네덜란드 여권을 디자인한 예레 반델토른 세계그래픽연합 회장은 지난달 22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새 여권 제작 과정을 소개했다. 네덜란드 여권의 표지색은 빨강. 반델토른 회장은 여권용으로 문장을 새로 개작할 것을 제안했고, 정부는 이를 허용했다. 깔끔해진 문장은 왼쪽 아래 배치됐다. 네덜란드 여권의 미학은 30여 쪽에 이르는 속지에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네덜란드 연대기를 삽화와 글로 표현했다. 언덕에서 일하는 농부와 중세시대의 전함·풍차·라디오를 비롯해 렘브란트 그림에서 일부를 따기도 했다. 말미에는 유럽연합 국기와 네덜란드 국기를 앞뒤로 배열해 나라의 미래상을 나타냈다. 각 쪽의 그림 아래 상자가 있다. 상자 안의 0.4㎜의 미세한 텍스트가 네덜란드 역사를 설명한다. 그림과 상자를 연결하는 선도 텍스트로 구성됐다. 위조 여부를 판별하는 보안 표지이기도 하다. 반델토른 회장은 “네덜란드 여권은 텍스트와 그림이 결합한 작은 책자”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부가 공공디자인 영역에서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며 “새 여권 디자인을 하는 데서 정부의 이해도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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