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마르트르의 사크레퀘르 성당. 영화 같은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
[매거진 Esc] 나의 도시이야기 여행작가 박준의 파리
파리에 머문 지 사흘째. 지하철을 기다리며 지도를 보고 있을 때, 그는 영화처럼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드니 아시아계 한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혼자 낯선 도시를 떠다니는 일에 지쳤을 때, 그는 바람처럼 다가왔다. 프랑스어로 말을 건넸지만, 그는 한국 사람이다. 스물두셋쯤이었을까. 대학 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가 생머리라는 정도를 제외하고 기억할 수 있는 건 없다. 이름도 모른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니 머리가 생머리였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 순간은 또렷이 기억하지만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1995년 8월20일, 기억은 느낌으로만 남았다. 나는 몽마르트르로 가는 길이었고, 그는 함께 지내던 말레이시아 친구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 배웅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내게,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주면 좋을 텐데 …” 하는 호의를 보였고, 난 그 말이 고마웠다. 지하철을 타고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어느 사이 몇몇 역을 지났다. 문득 그가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한단다. 우리는 오후 늦게 몽마르트르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지하철 앙베르 역에서 내려 몽마르트르로 오르는 언덕길은 거칠고 엉성한 동대문 시장통 같았다. 몽마르트르 광장은 작지 않고,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사크레퀘르 성당과 몽마르트르 광장을 서성이며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끝내 만날 수는 없었다. 영화 같은 만남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란 설정은 근사하지 않은가. 하지만 영화의 관습과 다르게 난 그를 만나지 못하고 서로 스쳐 지나갔다. 그날 저녁 난 파리 북역에서 브뤼셀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스쳐 지나갔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기에 그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 그는 몽마르트르에 오지 않았던 것일까. 왔는데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뒤늦게 도착한 것일까. 난 알 수가 없다. 작은 키에 약간 통통했던 그의 말레이시아 친구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없었으면 우리는 시간을 같이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미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나? 난 왜 좀더 기다려 보지 않았을까. 간절히 보고자 했다면 밤늦게까지라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차시간이 다가오자 서둘러 역으로 움직였다. 핑계는 있다. 그날밤 브뤼셀로 가서 다음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브뤼셀까지는 고작 두 시간 반 거리다. 기차표를 버린다고 비행기를 못 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마저도 변명이다. 문득, 난 무엇을 위해 온몸을 던져 본 기억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후회할 여지를 남겨 놓고 산다. 여지는 미련을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춤거리게 한다. 누군가는 살면서 자신을 완전히 연소시키고 싶다고 하고, 누군가는 그 뒤에 올 허무가 두렵다고 한다. 나는 편을 가르자면 어느 쪽일까. 로맨틱한 도시, 파리에서도 헛헛한 열정은 그를 잃어버린다. 열정은 언제나 삶에 필요했다. ·〈On the Road-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지은이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