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7.11 16:12
수정 : 2007.07.1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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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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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너 좀비지?
무더운 여름 밤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산길을 걷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늦어 버렸다. 산 중턱쯤 내려왔을 때 길 옆의 희끄무레한 비석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젠장, 찜찜하게!” 그가 중얼거렸다. 외면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참 뒤,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마저 흡수해 버린 침묵 속에서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 지친 모습으로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손짓을 했다.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가지 마.” “노인이 도움을 요청하는 거 같은데?” 그는 벌써 그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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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황당한 저주>(UPI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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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에 절은 나는 서서 멀어지는 그를 우두커니 바라봤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노인은 그의 팔을 잡았다. 탈진했나? 가봐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쓰러진 건 노인이 아니라 그였다.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노인의 눈이 순간 번쩍했다. 한쪽 눈 뿐이었다. 노인은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에게 가야 할 텐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인이 점점 다가왔다. 불과 서너 걸음을 앞둔 곳에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오른쪽 뺨에 시뻘건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입에서는 그보다 더 붉은 살점이 흘러내렸다.
나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건 꿈일 거야. 가위에 눌리고 있는 것뿐이야. 아침이면 언제나처럼 내 침대에서 깨어날 거라구. 오른 발이 접질린 고통도 잊은 채 산 비탈을 내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온 산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노인의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하지? 그는 괜찮은 걸까. 고개를 들었다. 평평한 길이 가깝게 보였다. 그 길 한가운데 쇼핑센터처럼 보이는 건물의 불빛이 보였다. 문 연 지 얼마 안 된 곳인가. 사방의 어둠과 정적 속에서 혼자 요란하게 빛을 내는 건물이라니. 유심히 보니 안에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다리를 절뚝이며 걷기 시작했다. 오른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발목이 화끈거렸다. 20분 정도만 더 걸으면 건물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밤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만으로 걷고 있는데 멀리서 하나 둘씩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 나처럼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다리를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저들도 나와 같은 일을 당한 것일까. 다가가서 아는 척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너무 지쳤다.
이제 건물의 통유리 문으로 안에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몹시 부산해 보인다. 심야 쇼핑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어쨌든 그곳에 들어가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문을 여는 순간 이 꿈에서 깨어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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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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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센터에 가까워질수록 흩어져 있던 사람들도 점점 모였다. 이상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의 얼굴은 ….
‘뛰어’ 머릿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 조금만 조금만 …. 문을 두드린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꿈쩍도 안 한다. 썩는 냄새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제발,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그다. “어디 있었어? 괜찮아?” 비명을 지르며 그를 향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눈물범벅이 된 시야가 흐렸다. 저쪽에서 비척비척 걸어오는 그가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그에게 안겼다.
그 순간, 섬광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뒷목을 파고들었다. 뜨끈한 액체가 등을 적셨다.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퀴퀴한 피냄새가 싱싱하고 비릿한 피냄새와 뒤섞였다. 그의 가슴에 떡진 암적색 피에 내 목에서 뚝뚝 떨어지는 선홍색 피가 꽃잎처럼 번지며 스며들어가는 걸 보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전보다 더 친한 친구가 됐다.
위 내용은 조지 로메로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시체들의 새벽>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좀비>를 엮어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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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서인도제도 부두교의 의식에서 유래된 말로 영혼 없이 살아있는 사람의 몸. 현대적인 의미에서 좀비는 다시 살아났거나 죽지 않은 시체를 의미한다.(위키피디아)
좀비족: 명사. 대기업이나 방대한 조직체에 묻혀, 일을 해도 안 해도 그만인 식의 무사안일에 빠져 있는 종업원을 일컫는 말.(새로나온 국어사전, 민중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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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단순무식함에도 가장 정치적인 괴물 캐릭터, 그 현실과 영화의 세계
당신은 좀비인가? ‘좀비 그거 귀신 아냐?’라고 섣불리 단정한다면 옆의 사전적 정의를 보시길. 한국의 국어사전은 살아 있는 시체라는 좀비의 어원적 정의 대신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을 ‘좀비족’이라고 먼저 정의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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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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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할 식욕에서 나오는 위력
이 사전적 정의에는 왠지 샐러리맨을 더 부려먹고 싶어하는 신자유주의의 냄새가 풍긴다. 본래 서인도제도의 민간 신앙인 부두교에서 탄생한 좀비가 주술과 약으로 영혼을 빼앗기고 노예가 된 사람을 일컫는다는 걸 염두하면 부두 좀비나 한국의 좀비족이나 일의 노예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서구 문화에서 좀더 친숙하게 호출돼 온 좀비는 사전적 정의와는 사뭇 다르다. 무덤에서 일어나 비척거리며 걷고, 사람을 공격해 인육을 먹고 또 물린 사람을 좀비로 감염시키는 일반적인 좀비의 모습은 60년대부터 영화광들을 사로잡았던 심야극장의 스크린에서 태어났다. 68년 나온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보통 사람들이 연상하는 좀비, 이른바 ‘모던 좀비’의 전형을 만들어낸 영화다.
사람을 물고 전염시킨다는 점에서 흡혈귀와 형제라고 할 만한 좀비는 여름밤 우리의 꿈을 두드리는 괴물 가운데서도 매우 이채로운 존재다. 일단 귀신이나 흡혈귀처럼 초현실적인 능력이나 전기톱을 든 살인마처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좀비의 능력은 사람보다 떨어진다. 힘은 살아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정도인데다가 의식이 없으니 머리를 쓸 줄 모른다. 그저 사람을 찾아 정처 없이 헤매다가 붙잡으면 정신없이 먹을 뿐이다. 그러나 좀비의 위력은 가공할 식욕에서 나온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그들은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공격하고 공격받은 사람은 좀비가 된다. 그래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숫자,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가 언제 돌변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좀비가 주는 공포의 실체다.
좀비는 그 단순무식함에도 불구하고 괴물 가운데 가장 정치적인 캐릭터로 읽힌다. 로메로의 시체 3부작 시리즈(<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시체들의 새벽> <죽음의 날>)은 로메로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각각 베트남전, 물질만능주의, 레이건의 군사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됐다. 또한 좀비의 탄생에는 방사능, 환경폐기물 등이 종종 결합된다. 이런 정치적 해석은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져 지난해 캐나다의 운동가들은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을 정해 <시체들의 새벽>의 좀비들을 흉내내며 크리스마스 과소비를 조롱하기도 했다.
좀비도 진화한다. 오랫동안 B급영화광들의 품 안에 있던 좀비를 진화시킨 건 아이러니하게도 좀비를 노예로 만들고자 했던 자본의 힘이다. 2000년대부터 할리우드 주류 영화에 침투하기 시작한 좀비는 <레지던트 이블> <새벽의 저주> <28일 후> 같은 영화에서 트레이드마크와도 같던 느린 걸음을 버리고 액션 스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로메로의 최근작 <랜드 오브 데드>에서 좀비는 지략을 짜서 인간과 전투한다. 올해 말에는 좀비 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나는 전설이다>가 윌 스미스 주연의 블록버스터 영화로 탄생해 또 어떤 진화를 보여줄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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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오브 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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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걸음에서 액션 스타로 거듭나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당신은 좀비인가. 지난해 말 출간된 스티븐 킹의 소설 <셀>에서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받고 좀비로 변한다. 점심시간, 사원증을 셔츠 주머니에 넣고 우르르 몰려나오면서, 휴대전화기를 들고 집단 주문처럼 주식 이야기를 중얼대고 있는 무리 중의 하나가 나라면 이미 나는 집단주의와 자본이 만들어낸 좀비일지도 모른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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