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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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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좀비영화 명장면 5
수많은 영화에 힌트를 준 <데몬스>, 경이롭게 전복적인 <새벽의 황당한 저주>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조지 로메로 감독여기, 할리우드가 숭상하는 제일의 가치 ‘가족주의’가 “씹어 먹히고” 있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가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사 독재자 같은 폭거를 일삼던 아버지(해리)는 내부 결속을 위해 일부러 갈등을 조장하는 보수 이데올로기를 상징한다. 좀비로 변한 딸이 이 비뚤어진 가부장과 순종적 어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들을 포식함으로써 영화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가족주의의 붕괴가 이뤄졌다. 자식이 아비를 먹어치우는 존속살해라니!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이지 라이더> 사이, 미국영화가 가장 뜨겁고 창조적이었던 시기에 나온 불후의 걸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그렇게 신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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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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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몬스> (1985) 람베르토 바바 감독
영화와 현실이 만나고 뒤섞이며 서로를 견제하는 광경은 늘 경이로워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으로 영화 속 공포의 확산을 보여 준 건 역시 <데몬스>다. 스크린 속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순간, 좀비로 변한 관객이 ‘스크린을 찢고 나와’ 모습을 드러낸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하나 둘씩 좀비로 변하고, 이곳을 탈출하고 보니 세계가 이미 좀비의 소굴이 돼 있더라는 내용의 이 영화는 이후로 수많은 영화에 아이디어와 힌트를 제공했다. ‘한국 최초의 고어영화’로 홍보됐던 박재범 감독의 <씨어터> 역시 <데몬스>를 인용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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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데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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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데드2>(1987) 셈 레이미 감독
지금 저 사내는 자신의 한쪽 팔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쪽 팔이 악령의 공기를 머금고 좀비가 돼 몸뚱이의 주인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인은 팔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전기톱을 장착한 채 좀비들을 처단하러 나선다. 요컨대 가장 끔찍한 장면이야말로 거꾸로 가장 웃기는 풍경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공포영화 역사상 가장 박진감 넘치는 슬랩스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장면을 통해, <이블데드> 시리즈는 공포와 유머,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품격을 거머쥐었다. 이 시리즈를 연출한 재능 있는 젊은이는 할리우드에 입성해 훗날, 블록버스터 <스파이더맨>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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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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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오>(1985) 스튜어트 고든 감독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주인공이 녹색 액체가 들어있는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시약이다. 하지만 이 시약은 아직 불완전해서, 사람을 좀비로 되살려낼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이 주사를 주입할 수 밖에 없다. 설사 좀비로 변한다 한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다면 상관없는 것이다. 과학의 윤리성과 인간의 욕망을 고민하게 하는 걸작 <좀비오>의 마지막 장면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라는 게 얼마나 무력하고 초라한 것인지 증명해내고 있다. 윤리에 저촉되는 실험도 대의를 위해선 문제없다는 과학자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이 시리즈 역시 되풀이돼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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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황당한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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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에드가 라이트 감독
에드가 라이트(<뜨거운 녀석들>)야 말로 장르영화의 미덕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아는 감독이다. 듣기에도 지루한 함의와 메시지와 장르적 장치들의 강박을 벗어나, 일단 흥겹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장르영화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조지 로메로의 좀비 영화로 국물을 우려내 홍콩의 의리파 갱 영화를 송송 썰어 넣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기시감을 양념으로 맛을 낸 기상천외한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더는 거장이 존재하지 않는 공포영화 장르의 불안한 미래에 한줄기 서광을 비추는 존재다. 좀비로 변한 친구와 콘솔 게임을 즐기는 숀의 마지막 모습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전복적 가능성의 최고치다.
허지웅/호러타임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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