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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18 17:07 수정 : 2007.07.18 17:07

알랭 드롱이 리플리를 연기한 영화 <태양은 가득히>.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어떤 사람은 왜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사칭할까? 아마도 자신을 소멸시키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죽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지루하고 비루한 진짜 삶, 그 예속의 굴레를.

이제는 전설이 된 사칭계의 기린아 톰 리플리도 그랬다. 알랭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 앤서니 밍겔라 감독,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리플리>는 모두 위대한 추리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 <더 탤런티드 미스터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로부터 그 모티프를 빌렸다.

재주꾼이라는 별명대로 그는 정말 재능 있는 인물이었으나,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잡기 전까지는 그 재능을 발현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는 전사가 거의 생략되어 있으나 이민자 출신의 빈곤층임이 암시되어 있고, <리플리>에서는 낮에는 피아노 조율사, 밤에는 호텔 벨보이로 일하는 고단한 처지였다. 원작의 리플리는 고아 출신으로 나름대로 청운의 꿈을 품고 올라온 뉴욕에서 별 하는 일 없이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반사기꾼 반백수다.

하늘이 무너질 만한 이변이 없다면 평생 도둑고양이처럼 도시의 그늘을 떠돌아야 할 처지. 그런 그에게 이탈리아 남부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선박회사 상속자를 데려오라는 특명 아르바이트가 들어온다. 그가 선뜻 먼길에 나선 것은, 마침 유럽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겠다, 경비도 생겼겠다, 꿩 먹고 알 먹자는 심사만은 분명 아니었을 터. ‘이곳’을 떠나는 일만이 그에게는 절실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지중해의 태양을 한번 맛본 자는 음침한 골목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어차피 그에겐 돌아갈 집도 없었지만. 리플리는 이탈리아에서 만난 디키에 매료된다. 리플리가 사랑한 것이 디키라는 인물의 (경제력으로부터 비롯되었을) 자유로운 영혼일까. 아니면 그 자유를 현시할 수 있는 생활방식일까? 그 매혹은 점점 집착이 되어 간다. 디키의 방에서 그의 고급옷과 고급구두를 몰래 신고서 혼자 ‘쇼’를 벌이는 장면이 그의 숨은 욕망을 상징적으로, 아프게 보여준다. 동경과 자기혐오는 같은 거울에 비친 빛과 그림자다.

만일 가능하기만 했다면 리플리는 디키와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영원히 둘이서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고, 그렇다면 아예 디키가 되기로 결심한다.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리플리가 돈과 신분이 탐나 디키를 죽였다는 단정은 틀렸다. ‘디키 그린리프’가 되는 것보다 ‘톰 리플리’라는 초라한 이름을 지우고 싶은 절실한 바람이 먼저였다.

사라 버튼의 책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자신을 바꾼 사람들>에는 평생 ‘내’가 아닌 ‘남’을 성공적으로 사칭하고 산 여러 명의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그들이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세상이 아니라 자신을 바꾼 모험가일 뿐 아니라 현실 탈출의 기술자였다고 말한다. 사회의 큰 금기 중 하나를 깨고 일관성 있게 거짓말 할 각오를 하자, 굳게 닫혀 있는 듯 보이던 기회의 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디키가 된 리플리는 정말 행복했을까? 거짓말을 감추려 계속 또 다른 거짓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밀과 죄의식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갈구하지만, 누군가와 그만큼 친밀해지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떠나 버려야 하는 비극적 아이러니 속에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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