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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26 15:01 수정 : 2007.07.26 15:01

<춘향뎐>(2000년)

[매거진 Esc]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춘향뎐>(2000년)

각색이 반역으로 귀결되는 불상사가 다반사지만, 영화로 말미암아 고전의 정수를 접하는 행운도 드물게 있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판소리의 미학을 영화의 열두 폭 치마에 받아 안아, 지금껏 우리가 아는 것은 <춘향전>이 아니라 그 줄거리에 불과했음을 깨우친다. 바야흐로 애간장 녹이는 ‘십장가’ 대목. 춘향(이효정)은 신관 사또 수청 들라는 청천벽력에 당돌히 한 일(一), 마음 심(心) 두 글자를 휘갈겨 응대하고, 노한 사또 “관장 조롱한 년”을 죽이라 명하니 춘향은 유부녀 겁탈은 죄가 아니더냐 악쓴다. 곤장 견디기도 큰일인데 매질을 북장단 삼아 절개까지 노래하니 탈진은 당연한 일. 반 넘어 혼절한 춘향이 방자 등에 업혀 나오자 간 졸이던 교방청 기생들이 우르르 내달아 포졸들을 꼬드겨 세우고.

향단이 품에 널브러진 춘향을 포대기 모양 휘휘 둘러싼다. 춘향 어미 월매가 배제된 이 장면의 구도에서 춘향은 모든 기생의 딸이다. 수심이 그득한 중에 한 기생의 입에서 얼씨구나 절씨구 지화자 좋을씨고 노랫가락이 새나온다. 애통한 지경에 무슨 망발인가 들어보면, 진주의 논개와 평양의 계월향이 왜장을 죽여 공을 세우고, 임금 살린 청주 기생 화월이 나라의 기림을 받았는데, 이제야 남원에도 현판감 열녀 기생이 났다는 자축의 노래다. 그러나 기꺼운 가사와 딴판으로, 여인의 목청은 곡한 뒤끝마냥 팍팍하고 음은 구슬프다. 변학도 말마따나 “기생이 수절이라니 사대부 댁에서는 아주 요절을 하겠다” 빈정대는 세상 아닌가. 주책스런 동료를 타박하던 기녀들의 얼굴이 수굿해지며 일제히 설운 빛이 드리운다. 이 대목은 명창 조상현의 소리를 줄곧 따르는 영화 <춘향뎐>에서 극중 인물이 노래하는 예외적 장면이기도 하다. 임권택 감독은 이 장면에서 반드시 기생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춘향은 “네 뜻이 어쨌건 기생의 딸은 관비요 기생”이라는 관리들의 말을 못 들은 척 우기고 있다. 입술을 앙다물고 ‘여염집 아낙’의 법도를 엄수함으로써 거꾸로 여염집 아낙의 이름을 얻겠다는 것이다. 철들자마자 어머니에게 아들 없다 걱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정 말라 다짐했다는 이 다부진 소녀에게, 연분은 사랑이기에 앞서 가만 있다간 영락없이 닥쳐올 계급적 전락에 저항하는 싸움이다. “기생의 딸이라니 잘되었다”며 만만히 수작 걸어온 양반에게 열여섯 춘향이 어쨌던가. 노리개 취급 않겠노라는 불망기를 기어이 받아 냈다. 부모 따라 한양 가니 불가불 이별이라는 몽룡에게 어찌했던가. 경대 들어 박살내고 나귀 발밑에 몸을 던져, 버릴지언정 쉬 잊지 못하도록 했다. 죽어 만나 좋을 호(好)자가 되자는 둥, 녹수에 원앙이 되자는 둥 갖은 감언으로 약속하는 양반 애인에게 춘향은 뭐랬던가. 번번이 “아니, 그것도 나는 싫소!”라고 못박았다. 그녀에겐, 죽어 무엇이 되기보다 이승에서 잘사는 것이 중요했다.

<씨네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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