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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26 17:44 수정 : 2007.07.27 10:29

‘프로패드’ ‘몰스킨’ 공책 등 20~30대에게 인기 많은 문구류.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김중혁 기자의 문구편력기… 엄선하고 또 엄선하는 노트, 펜은 과소비의 극치

서랍을 열어 보니 쓰다 만 노트가 가득하다. 그 옆으로 펜도 수북하다. 마지막 장까지 다 쓴 노트 하나 없고, 잉크를 다 쓰고 버린 펜이 없다. 과소비도 이런 과소비가 없다. 그런 주제에 시내에 나갈 일이 있으면 또 문구점을 기웃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이다.

자신이 환자임을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다. “그래, 까짓거 문구 좀 사봤자 돈 얼마나 든다고 …” 하며 마음을 달랜다.

몰스킨을 펼치면
뭐라도 쓰고 싶어지더라

누구에게나 개인적 취향이 있겠지만, 나는 끈 달린 수첩이나 노트를 보면 ‘껌뻑’ 죽는다. 어슬렁거리다가도 끈 달린 수첩을 보면 걸음이 멈춰진다. ‘엠엠엠지’(mmmg)의 형광빛 도는 수첩을 보는 순간에 ‘껌뻑’ 죽었다. 판형도 독특한데다 내지의 디자인도 세련됐다. ‘7321디자인’의 아르데코 수첩을 볼 때도 그랬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작고 단순하고 기본적인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이 수첩에도 끈이 달렸다. 왜 이렇게 끈에 집착하는 것일까? 노트를 쓰는 일은 하나의 연결된 동작이다. ① 노트를 편다. ② 펜을 꺼낸다. ③ 뭔가를 쓴다. 하지만 이걸론 부족하다. 하나가 추가돼야 한다. ④ 끈으로 노트를 감싼다(혹은 묶는다). 끈으로 노트를 감싸면 비밀을 봉인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끈 달린 수첩에 껌뻑 죽는 이유다.

몇 년 전부터는 몰스킨의 노트에 ‘꽂혔다’. 몰스킨 노트에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게 다 있다. 내가 쓰는 명칭으로는 ‘3단 노트’(3단 변신 노트가 아니)다. ‘단순할 것, 단단할 것, 단아할 것.’ 몰스킨 노트는 이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킨다. 게다가 끈까지 달렸다. 조금 비싸긴 하지만 그럴 만하다. 몰스킨을 펴들면 무엇이라도 쓰고 싶어진다. 뭔가 대단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도 생긴다. 결국 대단한 글을 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도가 중요하다.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수첩이나 노트는 그 자체로 훌륭하다. 몰스킨뿐 아니라 모든 노트는 훌륭하다. 노트북이나 컴퓨터의 새하얗고 텅 빈 화면과는 비교할 수 없다.

홍익대 근처에서 약속이 있을 때면 꼭 ‘호미화방’에 들른다. 전문 미술인도 아니므로 살 게 많지 않다. 그래도 꼭 구경한다. 노트와 도화지와 물감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나올 때는 ‘Canson’에서 만든 엑스엘 노트를 한 권 산다. 스케치북인데 종이 질감이 아주 좋다. 부드럽게 까끌하다. 한 장씩 뜯어낼 수도 있다. 뭔가 그리고 싶어진다. 조금 비싼 게 흠이긴 하다.

비싼 노트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프로패드’(Pro-Pad)는 가장 완벽한 노트다. 여기엔 뭘 써도 좋다. 연락처를 적어도 좋고, 해야 할 일을 적어도 좋고, 아이디어를 메모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결정적으로, ‘싸다’. 다이어리로는 양지사에서 나온 ‘유즈어리’(Usually) 시리즈를 능가한 제품을 보지 못했다. 만약 당신이 프랭클린 다이어리의 ‘폼 나는’ 스타일에 질린 사람들이라면, 작심삼일의 대가라면, 유즈어리 시리즈를 권한다. 쓰다 버려도 미련 없다. 미련 없으므로 오히려 더 잘 쓰게 된다.


얼마 전에 방배동 서래 마을을 어슬렁거리다 ‘아프레미디’(02-591-9430)라는 카페를 발견했다. 아프레미디에는 몰스킨, 로디아 등의 노트로 가득하다. 디자인 제품도 꽤 있다. 거기서 ‘치아크’(Ciak)라는 이탈리아 회사의 빨간 노트를 샀는데, 종이의 두께와 겉가죽의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치아크’는 이탈리아제 핸드메이드 제품이고 내털리 포트먼이 영화에서 사용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여기에도 (아니나 다를까) 노트를 묶을 수 있는 고무밴드가 달렸다.

아예 몇 다스 사놓은 보난자 연필 시리즈

노트는 그나마 엄선하고 엄선해서 사는 편이지만 펜은 과소비가 더 심하다. 한때는 “세상 모든 종류의 연필을 모아야지”라는 꿈을 가진 적도 있었다. 꿈은 포기했지만, 보이기만 하면 여전히 연필을 산다. ‘파버-카스텔’의 보난자 시리즈는 아예 몇 다스를 사놓았다. 스태드틀러의 ‘트라이플러스 슬림’(Triplus Slim)은 색이 너무 아름다워 종류별로 모았다. 파버-카스텔의 ‘골드파베르’(Goldfaber)는 만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있다. 펜텔의 샤프펜슬은 색별로(심 굵기에 따라 몸체의 색이 다르다) 갖추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굵기를 선택한다.

가끔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을 때가 있다. 어째서 이렇게 문구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문구를 사모으고, 문구에 집착하는 것에는 나만의 이유가 있다. 눈만 돌리면 컴퓨터 화면이고, 고개만 돌리면 디지털이고, 손만 대면 인터넷이 되는 지금 이곳에서 ‘종이 위에 뭔가를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행동인지, ‘낙서하고 끼적거리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스스로에게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지만….

김중혁 기자 pen@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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