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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숲>(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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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거미숲>(2004) 상상력의 거울 앞에 현실을 놓고 그 반영을 그리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거꾸로 이지러진 반영으로부터 거울 앞에 놓인 현실의 형상을 가늠하는 영화도 있다.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은 후자다. 숲속 외딴집에서 방송사 국장과 젊은 여자 아나운서가 낫에 찍힌 주검으로 발견된다. 목격자는 죽은 여인(강경헌)과 재혼을 앞둔 방송사 프로듀서 강민(감우성). 범인을 뒤쫓다가 머리를 다쳐 14일 동안 의식을 잃었던 그는 깨어나기 무섭게 숲으로 돌아가려 한다. <거미숲>은 꿈의 문법으로 씌어진 이야기다. 살인 사건 수사가 진행되는 현재와 범죄가 저질러진 과거, 그리고 비극의 뿌리가 묻힌 대과거가 종횡으로 연결된다. 심지어 현실과 환상, 기억이 한 광경을 구성하기도 한다. 여기는 난생처음 만난 여인이 아내와 똑같은 목소리로 어린 시절 첫사랑을 들춰내는 몽환의 세계다. <거미숲>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지도는 뇌의 단면도다. 동굴은 실제 동굴인 동시에 마음의 동굴이고, 터널은 의식의 터널이며, 사진관은 기억의 사진관이다. 하나같이 어둠이 흥건한 이 공간들은 시간의 궤도가 꼬여 겹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거기서 주인공 강민은 기어코 잃지 말아야 했으나 잃어버린 사람들과 재회한다. 개중에는 자신의 뒷모습도 있다. <거미숲>의 가장 깊은 슬픔은, 다시 만난 사람들이 재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너무 늦게 깨달을 때 솟아난다. 한밤중에 귀가한 강민이 의자에 피곤한 몸을 기댄다. 그는 무용가 아내 은아(서정)의 외국 공연에 동행하기 위해 몰아쳐 일하는 중이다. 인기척을 들은 아내가 불 꺼진 방에서 홀연 나타난다. “나쁜 꿈을 꿨어!” 차를 따라주는 아내에게 강민이 잡담을 한다. 당신 공연에 동행했는데 상사가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공항에서 포기하고 혼자 돌아오는 꿈이었다고. 그런데 그 비행기가 악천후로 추락해 당신만 죽는 악몽이었다고. “그랬구나.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귀기울이던 아내가 담담히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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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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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남자가 아내 이전에도 사랑하는 존재를 갑작스레 잃었고 아내 이후에도 잃을 것이라고 들려준다. 그는 떠난 이들을 기억하거나 망각하느라 마모되어 가는데, 정작 그를 기억해 줄 사람은 등 뒤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천천히 깨닫는다. 분노가 그에게 썩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미스터리는 “누가?” “왜?”, 혹은 “어떻게?”를 묻는다. <거미숲>은 그 세 가지 질문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생김새가 교묘한 수수께끼다. <씨네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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