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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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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일본에서 북유럽을 돌아 남미까지, 한여름밤의 재미있는 추리소설 고르기
밤은 더웠고, 나도 더웠다. 날아드는 모기떼에 진저리를 치며 얼음물을 마셔도 숙면은커녕 설사만 심해졌다. 어두컴컴한 방 천장을 보며 사지를 긁적이기도 지겨워, 난 재미있는 추리소설들을 쌓아놓고 차례로 읽기 시작했다. 책 안에, 길이 있었다. 무더위를 핑계삼아 나는 올여름 최고의 추리소설을 찾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길은 때로 거칠었고, 피냄새가 강하게 났으며 …, 대낮에도 오싹했다.
‘눈이 나빠’ 과거만 들여다보는 탐정
난 뒷맛이 싸하다는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북폴리오 펴냄)부터 꺼내들었다. 주인공 이름은 작가 이름과 같은 와카타케 나나미다. 새로 창간하는 사보에 단편소설을 실으라는 명을 받은 와카타케는 대학 선배에게 단편소설을 써 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그 선배는 지인을 추천한다. 단편소설 필자는, 익명으로 소설을 싣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사보에는 12편의 단편들이 실리는데 이 단편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귀여운 암호풀이부터 오싹한 이야기 등 꽤 다채로운 단편들이 들어 있는데, 어째 작품들 수준이 고르지가 않다. 투덜투덜. 하지만 단편이 끝나고 나서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 오싹한 반전이 숨어 있다. ‘일상의 미스터리’라는 말 뒤에 일상의 그것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공포가 숨어 있다.
꺅꺅 비명을 지르다 보니 좀더 꺅꺅거려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있던 마조히즘이 눈을 뜬 것인가! 고심 끝에 찾아간 곳은 장미십자탐정사무소.
<백기도연대>(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이길진 옮김, 솔 펴냄)는 일종의 ‘외전’으로, 교고쿠도 시리즈에 나오는 에노키즈 레이지로라는 기묘한 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책이다. 에노키즈는 ‘눈이 나빠’ 안 좋은 것들을 보는 사람이다. 한 인간이 과거에 겪은 일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탐정을 하고 있으니 수사는 뒷전이다. 피해자나 가해자를 보는 것으로 사건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백기도연대>는 중편집으로, 사건 자체만큼이나 에노키즈의 행각이 재미있다. 스스로 신을 자청하는 또라이인 그는, 옆에서 보나 위에서 보나 아래서 보나 영락없는 정신병자이지만, 재벌집 아들인데다 굉장히 잘생겼기에, 책을 읽다 보면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며 호탕하게 구는 면도 약간 멋있어 보이면서, 피학 체질인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귀신을 만나기보다 피학 체질이 되는 게 무서워진 나는 서둘러 짐을 싸 제대로 된 탐정을 찾아갔다.
소년탐정 김전일이 목 터지게 부르짖던 ‘할아버지’, 긴다이치 고스케가
<악마의 공놀이 노래>(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시공사 펴냄)에서 노래에 맞춰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한다. <옥문도> <팔묘촌>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긴다이치 고스케는 비듬 소굴인 머리를 긁적이며 죽을 사람이 다 죽은 뒤에야 “난 이미 진상을 알고 있었다”고 나서는 약간 파렴치한 인물인데, 연쇄살인, 밀실살인을 해석하는 데 귀신 같은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한 마을이나 집안에 존재하는 오랜 원한에 얽힌 사건에 주로 얽혀들기 때문에, 그가 있는 곳에는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일도 많다. 으스스한 분위기, 오싹한 살인사건, 명쾌한 해답. 탐정이란, 이래야 하는 거다. 하지만 날도 더운데 자꾸 비듬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숨이 턱 막혀 추운 나라로 도망가고 싶어졌다.
추리문학대회에서 살인사건 벌어지다
추운 나라의 추리물은 정말 ‘춥게’ 느껴지는 일이 많다. 추위와 건조함 자체가 이야기의 한 축이나 문체를 구성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무덤의 침묵>(아르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미정 옮김, 영림카디널 펴냄)은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가 무대다. 영국 추리작가협회의 황금단도상을 받은 이 책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무서운 속도로 사람을 빨아들인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어린이의 생일 파티장에서, 아이가 뭔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다. 바로 인간의 뼈. 그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비극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슬픈 울림을 낳는다. 읽다 울어도, 책임지지 않는다.
추위에 덜덜 떨다가 눈을 돌린 곳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핑거스미스>(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펴냄)는 뭐, 굳이 말하자면 레즈비언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아름답고, 섬세하고, 치밀한 …, 통속 소설. 고아인 수는 런던 뒷골목에서 석스비 부인이라는 여자 손에 자란다. 열일곱이 된 수는 ‘젠틀먼’이라는 수상쩍은 남자에게서 한 여자의 몸종으로 일하라는 제안을 받는다. 젠틀먼의 목표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여자를 자신의 손에 넣는 것. 수도 사기행각에 참여하지만 상속녀 모드를 만나면서 상황은 묘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1장, 2장, 3장의 화자가 달라지면서 베일을 벗는 사건의 진상이 충격적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숨 막히는 공기에 눌려 있다 보니 자유로운 분위기를 맛보고 싶어졌다. 까짓거, 이열치열, 남미로 가자.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지음, 김라합 옮김, 웅진 펴냄)은 분량도 적고 내용도 약간 허술한데, 설정이 꽤 재미있는 책이다. 보르헤스가 책에 등장하는 이색 추리물이기 때문이다. 이걸 오마주라고 해야 하는지 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한 추리문학 대회에서 밀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살인자의 정체를 두고 온갖 추리가 오가는데, 재밌는 건, 과연 살인사건 해결이 등장인물의 관심사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추리보다 유머, 그리고 보르헤스라는 인물의 매력이 버무려진 책이다.
남미라니 …, 너무 멀리 갔다. 터벅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
<유지니아>(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비채 펴냄) 속으로 들어간다. 온다 리쿠의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 <밤의 피크닉>과 더불어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단서가 하나 나오면 미스터리가 하나 늘어나는 것 같으니, 사건을 빈틈없이 해결하겠다고 나서면 더없이 답답하지만 머리를 쉬게 해 주고, 그 뜨겁고도 서늘한 여름의 한쪽으로 몸을 던지는 편이 이 소설을 즐기는 방법일 것이다. 20여 년 전에 일어났던 일가족 독살사건. 유일한 생존자는 앞을 볼 수 없는 소녀였다. 20년이나 지나서 누군가가 그 사건을 다시 캐고 있다.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모든 게 다 새파란 음영을 띠며 불안을 극대화할 무렵, 이야기는 끝난다.
범인을 자극하는 스기무라 사부로의 매력
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마음을 기댈 만한 추리소설 주인공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름 없는 독>(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북스피어 펴냄)의 스기무라 사부로라면, 멋진 선택일 것이다. 재벌집 외동딸과 결혼해 사보 편집자로 일하는 그는 그야말로 ‘소설에나 있음직한’ 행복한 가장의 전형이다. 새집증후군, 병적 거짓말쟁이 ….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상적인 사건사고들과 일간지 사회면에서 읽게 되는 흉악한 범죄가 하나로 녹아들면서 현실을 반추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너무 안온해서 싫은 동시에 동경하게 되는 스기무라 사부로의 독특한 매력은 범인들을 자극하고 있는 게 틀림없지만, 그래서 재미있다.
그런데, 여름밤은 이렇게 추리소설 읽으면서 보낸다고 치고, 낮에 직장 생활은 어떻게 하지? 해답을 아시는 분은 이메일로 좀 알려주시라.
이다혜/ 좌충우돌 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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