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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모퉁이의 불가사의한 웃음소리를 추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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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영국 체스터턴의 1911년 작품- 거리 모퉁이의 불가사의한 웃음소리를 추적하다
Esc가 강력 추천하는 고전
바닷가 나무 그늘에서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 것만큼 평화로운 풍경이 없습니다. 추리소설은 여유의 장르입니다. 마음이 복잡하면 읽을 수 없습니다. 소설 속으로 빠져 들 수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여유로운 한때를 위해 지금껏 발표된 수많은 추리소설 중에서 딱 한 편을 고르기로 했습니다. 자료도 보았습니다. 전문가와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작품을 읽어 보았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 로알드 달, 코넌 도일, 애거사 크리스티 등 수많은 작가들이 후보에 올랐습니다. 결국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단편 <보이지 않는 남자>가 당첨됐습니다. 여러분께 강력추천합니다.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 재미도 있으며 문학적이기도 합니다.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체스터턴을 두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체스터턴은 가장 위대한 추리소설가로 에드거 앨런 포를 꼽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체스터턴 자신이 포보다 더 훌륭한 추리소설을 썼다.” 는 보르헤스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 짧고 강렬한 작품과 함께 섬뜩하고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캠던 타운에 차갑고 푸르스름한 땅거미가 깔리자, 모퉁이 제과점은 담뱃불처럼 깜빡였다. 아니 오히려 화려한 색깔의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다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이 빛이라는 게 알록달록한 케이크와 사탕 위에서 반짝반짝 춤을 추면서, 갖가지 색깔과 모양을 유리창에 비춰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의 많은 부랑아들이 한참 동안 그 유리창에 코를 박고 서 있었다. 초콜릿보다도 붉은색과 초록색, 그리고 금색 등의 반짝이는 포장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진열장 안에는 커다랗고 새하얀 웨딩 케이크도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지만, 마치 북극 전체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은 만족감을 주었다. 이러한 무지갯빛 자극이 열두어 살의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퉁이 가게는 조금 더 나이가 든 청년에게도 꽤나 매력적이었던가 보다. 스물네 살 안팎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같은 가게의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며 서 있었다. 그에게도 이 가게는 아주 매혹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이 가게의 매력이 전적으로 초콜릿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초콜릿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롤빵 하나와 커피, 그리고 청혼
그는 키가 크고 건장하며 머리카락이 붉은 청년으로 얼굴에 굳은 결의가 있어 보였는데, 왠지 미적대고 있었다. 옆쪽에는 흑백 스케치들을 모은 납작한 잿빛 화첩을 끼고 있었다. 그는 현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강의를 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로 몰려 해군 장교였던 백부에게 의절당했고, 이후 출판사에 자신의 스케치를 팔아 그럭저럭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 턴불 앵거스였다.
그는 마침내 제과점 안으로 들어서더니 진열대를 지나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앉아서 빵 같은 걸 먹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는 젊은 여종업원에게 유쾌하게 모자를 들어 보였다. 그녀는 가무잡잡하고 우아하며 민첩했으며,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혈색이 좋았고 검은 눈동자는 영리해 보였다. 그녀는 늘 그렇듯이 잠시 사이를 두고 그에게로 와서 주문을 받았다.
주문 내용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0.5페니짜리 작은 롤빵 하나하고 커피 주십시오.”
여종업원이 돌아서기 직전,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갑자기 뻣뻣하게 굳은 그녀가 대답했다.
“그런 농담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붉은 머리의 젊은이가 뜻밖의 진지함을 담아 잿빛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진심입니다. 이 롤빵만큼이나 심각하게 한 말입니다. 이 빵처럼 비싸고, 이 빵처럼 소화하기 힘든 말이라구요.”
여종업원은 검은 눈을 그에게서 떼지 않은 채, 거의 비정하다 하리만치 엄격하게 그를 뜯어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살며시 얼굴에 미소의 그림자를 띠며 의자에 앉았다.
“0.5페니짜리 빵을 먹는 것이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둘이 같이 있으면 1페니짜리 빵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우리가 결혼하면 0.5페니짜리 빵을 먹는 야만스런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여종업원이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창가로 걸어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마음이 조금은 흔들린 모양이었다. 그녀가 마침내 결심한 듯 몸을 돌렸을 때, 당황스런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젊은이가 가게 진열대에서 이것저것 가져다가 탁자에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색색의 사탕들이 수북했으며, 샌드위치, 그리고 포트 와인과 셰리주가 올라왔다. 그는 이것들을 단정하게 늘어놓은 후,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던 케이크를 들어다가 가운데에 조심스레 놓았다. 하얀 설탕이 수북이 흩뿌려진 케이크였다.
“도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로라 양.”
“오, 맙소사, 잠시만요. 그리고 제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이게 다 뭐냐니까요!”
“축하 음식입니다.”
“그럼, 저건 뭐예요?”
“웨딩 케이크지요, 앵거스 부인.”
로라는 앵거스가 늘어놓은 사탕들이며 샌드위치 앞으로 다가오더니 딸그락 소리를 내며 그것들을 치우고는 웨딩 케이크를 다시 가게의 진열대로 가져다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돌아와 앉아 우아한 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꽤 화가 나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다는 듯이 이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제게 생각할 시간은 조금도 주시질 않는군요.”
“나는 그런 바보가 아닙니다. 그게 바로 나의 기독교적인 겸손함이지요.”
보물을 찾겠다며 떠난 웰킨과 스마이드
그녀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미소 뒤에는 상당한 심각함이 깃들어 있었다.
“앵거스 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더 하시기 전에 저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가능한 짧게 말씀드릴게요.”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좋아요. 그 말을 하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으면 좋겠는데요.”
“오, 제발 그만 하시고 제 말 좀 들으세요. 이 일은 제가 부끄러워할 것도 그렇다고 특별히 미안해할 것도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저랑 상관없는 바로 그 일이 저의 악몽이 되고 있다면 뭐라 말씀하시겠어요?”
“그런 경우라면 … 저 케이크를 다시 가져오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사내는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먼저 제 이야기부터 들으세요.”
“우선, 제 아버지께서 루드베리에서 ‘붉은 물고기’라는 여관을 운영하셨다는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그리고 저는 그곳 바에서 일했죠.
루드베리는 잡초가 무성한 분지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곳이랍니다. 그래서 ‘붉은 물고기’로 찾아드는 사람들이란 가끔 들르는 외판원들이나 그도 아니면, 당신은 아마 만나본 적도 없는, 가장 끔찍하고 저속한 부류였죠. 하는 일 없이 술집이나 경마장을 기웃거리며 간신히 먹고사는 사람들 말예요. 꼭 자기네한테나 어울릴 만한 복장을 하고 다녔죠. 하지만 이런 젊은 건달치들조차 우리 여관에는 그리 흔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유난히 우리 여관에 자주 들르는 두 남자가 있었지요. 그들은 둘 다 물려받은 돈으로 먹고살았는데, 지나치게 옷에 치장을 하는데다가 지독히도 게을렀어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그들을 조금은 가엾게 여겼죠. 둘 다 조금씩 불구였거든요. 어쩌면 이들이 우리 가게처럼 작고 썰렁한 곳을 찾는 이유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아시다시피, 어떤 시골뜨기들은 이런 사람들을 비웃곤 하잖아요. 하지만 딱히 불구라고 말할 수도 없었어요. 그보다는 이상하게 생겼다고 하는 편이 낫겠어요. 한 명은 키가 너무나 작았어요. 마치 난쟁이나 아니면, 적어도 승마 기수 같았죠. 그래도 겉모습은 기수 같지 않았어요. 머리는 둥글고 검었으며, 턱수염도 검은색이었는데 잘 다듬어져 있었지요. 눈은 꼭 새처럼 생겼고요. 주머니에 있는 동전이나 금시곗줄을 짤랑거리며 다녔죠. 모양은 또 어찌나 부렸던지. 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답니다. 잡기에는 아주 능했거든요. 즉흥적으로 마술을 한다거나, 성냥개비 열다섯 개로 불꽃 쇼를 하기도 했고, 바나나 같은 것들을 잘라서 춤추는 인형을 만들기도 했어요. 카운터로 다가와서 시가 다섯 개비로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캥거루를 만들곤 하던 이시도르 스마이드의 작고 검은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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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일러스트는 1911년 오리지널 에디션에 수록됐던 시드니 세이모 루카스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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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사내는 그보다 더 조용하고 더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 불쌍한 작은 스마이드보다 훨씬 더 저를 놀라게 하는 데가 있었어요. 그는 키가 아주 컸고 호리호리했어요. 옅은 색의 머리와 높고 오똑한 코, 괴상한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지만 잘생긴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오싹한 사시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답니다. 저는 그런 눈을 생전 처음 봤어요. 항상 정면을 본다고 하는데도 그 사람의 눈은 늘 엉뚱한 곳을 향해 있거든요. 저는 이런 외관상 결함이 이 불쌍한 사람의 마음을 몹시도 상하게 했나 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왜냐하면 스마이드가 어디든 가리지 않고 그 재주 좋은 마술을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반면, 제임스 웰킨은, 그 사시 남자 이름이에요, 우리 여관 바에 죽치고 앉아 술을 마시거나 황량한 시골길을 혼자서 한없이 걸어다니기만 했거든요. 한편 저는, 스마이드 역시 영리하게 처신을 잘하기는 하지만 역시 자신의 작은 키에 민감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같은 주에 그 두 사람이 제게 거의 동시에 청혼을 해왔을 때 놀라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했어요.
실은 저도 나중에 제 행동이 참 어리석었구나 하는 생각은 했어요. 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기기는 했어도, 어떤 면에서는 제 친구들이었거든요. 전 제가 청혼을 거절한 진짜 이유가 생김새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될까 두려웠어요. 그래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지 않는 사람과는 그 누구하고도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구실을 만들었죠. 저는 그들처럼 단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만 먹고사는 것은 제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어요. 저로서는 고민 끝에 내놓은 구실이었죠. 그런데 이 말을 한 지 이틀 만에 일이 터져버렸어요. 이 두 사람이 글쎄, 동화책에 나오는 얼간이들처럼 자신들의 보물을 찾는다며 떠났다는 거예요.
그 뒤로 지금까지 그 두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스마이드한테서 놀라운 내용의 편지를 두 통 받은 것을 빼면요.”
그 사내의 목소리가 저를 미치게 해요
“다른 남자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나요?”
“없었어요. 편지 한 통도 없었죠.”
로라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을 말씀드리면, 그는 웰킨과 함께 런던으로 가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걸음이 빠른 웰킨을 따라잡을 수 없어서 도중에 뒤처져 길가에서 쉬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유랑극단을 만나 합류했대요. 그 사람은 거의 난쟁이에 가까웠고 아주 영리한 익살꾼이었으니까, 그 분야에 꽤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는 곧 아쿠아리엄 극장으로 가서 마술을 했다더군요. 이게 그 사람이 보낸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이었어요. 두 번째 편지의 내용은 그보다 훨씬 더 놀라웠는데, 바로 지난 주에 받았어요.”
앵거스는 마시던 커피를 마저 비우고 온화하고 참을성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조금 일그러뜨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앵거스 씨도 ‘스마이드의 조용한 하인들’에 대한 광고를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아직 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아마도 광고를 보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 될걸요. 아, 저도 그것들에 대해 많이 아는 건 아니에요. 모든 집안일을 기계가 대신할 수 있게 하는 어떤 태엽 장치 같은 것이라고 들었어요. 당신도 아마 아실 거예요. 왜 ‘버튼만 누르세요―술 마실 염려가 없는 집사’ ‘손잡이만 돌리세요―수다 떨 염려가 없는 열 명의 하녀들’ 같은 광고 있잖아요. 어떤 기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데요. 맞아요, 바로 그 사람이에요. 저도 그 사람이 자립했다니 기뻐요. 하지만 그 사람이, 이제 스스로 길을 개척했다고 말하며 나타날까 봐 두려워요. 정말로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면, 또 다른 남자에게선 연락이 없었나요?”
앵거스는 침착하지만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로라 호프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앵거스 씨, 당신은 정말 마법사 같아요. 맞아요. 당신 말이 옳아요. 웰킨이 쓴 편지는 단 한 줄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마치 죽은 사람인 양 아무 소식도 없어요. 그런데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건 바로 그 사람이에요. 내 길을 막아서고 있는 사람도 바로 그 사람이고, 나를 반쯤 미치게 만드는 사람도 그 사람이에요. 정말, 그 사람이 나를 미치게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 곳에서 그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그가 말할 리가 없는데도 그의 목소리를 들어요.”
“자, 사랑하는 로라 양. 그자가 악마라면 이제 됐습니다. 당신이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했으니 끝난 겁니다. 사람은 혼자 고민을 안고 있을 때 미쳐 간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 사팔뜨기 친구의 환청을 듣거나 주위에 있다고 상상한 것이 언제지요?”
“저는 웰킨의 웃음소리를 당신 목소리처럼 분명하게 들었어요.”
로라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환청이 아니었다구요. 저는 그때 가게 바로 밖 모퉁이에 서 있었기 때문에 거리 양쪽을 한번에 내려다볼 수 있었거든요. 저는 그의 눈만큼이나 이상했던 그의 웃음소리를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거의 일 년 동안 그 사람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분명히 그의 웃음소리였어요. 그러나 불과 몇 초 후에 그의 경쟁자에게서 첫 번째 편지를 받았죠.”
“스마이드와 결혼하면, 그는 죽는다”
“그 유령이 말을 하거나 소리를 낸 적이 있나요?”
앵거스가 흥미를 가지고 물었다.
로라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이어 안정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어요. 자신의 성공을 알리는 스마이드의 두 번째 편지를 읽고 나서였어요. ‘그래도 그자는 당신을 차지할 수 없어.’ 웰킨이었어요. 마치 그 사람이 가게 안에 있는 것처럼 너무나 분명하게 들렸어요. 너무 끔찍했어요. 전 제가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죠.”
“만일 당신이 정말 미쳤다면,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는 뭔가 기묘한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두 개의 머리가 하나보다는 낫고, 두 사람의 마음을 합치면 한 사람보다 낫겠지요. 만일 이 강하고 쓸모 있는 남자에게 저 진열대에서 웨딩 케이크를 다시 가져오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가게 밖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자동차 한 대가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달려와 가게 문 앞에 급정거한 것이었다. 차문이 열리고 반짝이는 실크 모자를 쓴 자그마한 사내가 내려섰다.
지금까지 정신적인 안정을 유지하면서 유쾌한 모습을 보이던 앵거스는,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새로운 인물과 대면하게 되자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을 보였다. 사랑에 빠진 젊은이는 직관이 날카로워진 터라, 그 사내를 흘끗 보고서도 그자가 누구인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난쟁이 같은 모습에 뾰족하게 다듬어 거만하게 앞으로 뻗쳐 있는 턱수염하며, 영리해 보이는 빈틈없는 눈빛, 단정하지만 아주 긴장된 손가락을 볼 때 조금 전에 설명을 들은 스마이드라는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술 마실 염려가 없는 집사’와 ‘수다 떨 염려가 없는 하녀들’로 백만장자가 된 이시도르 스마이드였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서로의 독점욕을 알아챈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의 경쟁 상대를 호기심 어린 냉철한 관용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스마이드는 그들의 적대감의 궁극적인 근원에 대한 언급은 없이 난데없는 말을 불쑥 내뱉었다.
“로라 양, 진열장 유리에 붙어 있는 저것을 보셨습니까?”
“진열장 유리에요?”
그녀가 앵거스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자세한 것을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뭔가 엉터리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조사를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난쟁이 백만장자가 짧게 말했다.
스마이드는 반짝이는 지팡이를 들어 조금 전까지 앵거스가 결혼 준비를 한다며 비워 두었던 진열대 유리를 가리켰다. 난쟁이 신사의 지팡이 끝을 따라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린 앵거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 기다란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세등등한 스마이드를 따라 가게 밖 거리로 나간 앵거스는 1미터 정도 되는 길이의 우표 종이(우표를 떼어내고 남는 부분의 종이로 뒷면에 풀기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종이 테이프로 활용하기도 했다)가 유리창에 조심스럽게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종이에는 ‘당신이 스마이드와 결혼하면, 그는 죽는다’라고 휘갈겨 씌어 있었다.
그 편지는 누가 갖다놓은 것인가
“로라 양, 당신의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군요.”
앵거스는 그의 커다란 붉은 머리를 가게로 들이밀며 말했다.
“이건 저 웰킨이라는 사내가 쓴 겁니다. 나는 그자를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지만, 그자는 항상 나를 괴롭혀왔죠. 지난 두 주 동안 내 아파트로 협박 편지가 다섯 통이나 날아들었어요. 그런데도 나는 누가 그 편지를 두고 갔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웰킨이 직접 가져왔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문지기는 수상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하니 말이오. 게다가 이제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가게 유리창에도 버젓이 이런 것을 붙이고 다니고 있습니다. 가게 안에 사람들이 있는데도요.”
스마이드가 거칠게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앵거스가 겸손하게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여기서 이렇게 차를 마시고 있는데도 그런 짓을 하다니. 무엇이 먼저인지를 아는 당신의 상식적인 태도에 경의를 표합니다. 다른 문제는 이후에 이야기를 하도록 합시다. 이런 짓을 저지른 사내는 아직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제가 십 분에서 십오 분 전 저쪽으로 갔을 때만 해도 종이 같은 것은 분명히 붙어 있지 않았으니깐요. 그렇지만 그자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 모르기 때문에 쫓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스마이드 씨, 제 생각에는 이 사건을 경찰 쪽보다는 명민한 사립탐정에게 맡기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마침 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여기서 차로 오 분 거리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플랑보라는 사람인데,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내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주 올곧고 정직한 사람이랍니다. 그의 명석한 머리만큼은 얼마의 돈을 들인다 해도 아깝지 않을 겁니다. 햄스테드의 럭나우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습니다.”
“거참, 이상한 인연이군요. 제가, 그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히말라야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거든요. 저와 함께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제 방으로 가서 웰킨이 보낸 그 이상한 편지들을 찾는 동안 당신은 가서 당신의 친구인 그 탐정 양반을 데려오십시오.”
난쟁이 사내가 검은 눈썹을 활처럼 구부리며 말했다.
“그게 좋겠군요. 자, 서두릅시다.”
앵거스가 정중하게 말했다.
두 남자는 묘할 정도로 즉흥적인 공명정대함을 보이며, 로라에게 똑같이 격식을 차려 작별 인사를 하고는 날쌔 보이는 작은 자동차에 뛰어올랐다. 스마이드가 차를 몰아 거리의 큰 모퉁이를 돌자 ‘스마이드의 조용한 하인들’이라는 문구가 씌어진 커다란 포스터가 앵거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가 없는 철제 인형이 ‘주인의 명을 절대 거스르지 않는 요리사’라고 적힌 소스 냄비를 들고 서 있었다.
“저것들을 제 집에서도 사용하고 있지요.”
검은 턱수염을 기른 난쟁이 백만장자가 웃으며 말했다.
“광고를 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정말 편리하거든요. 솔직히 객관적으로 말해서 제가 만든 이 거대한 태엽 인형들은 어떤 손잡이를 누르는지만 알다면, 제가 아는 한 그 어떤 살아 있는 하인들보다도 더 신속하게 석탄을 가져다 때고, 포도주나 시간표 같은 것들을 가져온답니다. 허나 우리끼리니 하는 얘기지만, 단점들도 있어요.”
“그래요?”
“그럼요. 그것들은 누가 제 아파트에 협박 편지를 두고 갔는지 말해줄 수가 없지요.”
마네킹 하인보다 더 흥미로운 것
스마이드의 자동차는 주인만큼이나 자그마하고 날쌨다. 사실, 그의 집안일을 하는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자동차 역시 그의 발명품이었다. 그가 광고나 해대는 사기꾼이라 해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상품에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황혼 무렵의 햇살을 받으며 구불구불하고 기다란 하얀 길로 들어서자, 마치 차를 타고 나는 듯한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 곧 그 하얀 길의 커브가 더 심해져서 어질어질해질 정도가 되었고 소위 상승하는 나선계단 위에 있는 것같이 여겨졌다. 그들은 경치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가파른 정도는 에든버러만큼 한, 런던의 외곽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언덕 위에 또 언덕이 있어 그들이 찾고 있던 아파트의 모습이 마치 특별한 탑이라도 되는 양 이집트의 피라미드같이 높이 솟아 석양에 빛나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히말라야 아파트 단지라고 알려진 초승달 모양의 거리로 들어서자, 창문을 열어젖힌 것처럼 급작스럽게 경치가 바뀌었다. 커다란 아파트 건물들이 마치 초록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런던 거리 위에 솟아 있었던 것이다. 아파트 단지의 반대편, 자갈이 깔린 초승달 모양의 거리 다른 한편에는 정원이라기보다는 방벽이나 가파른 산울타리같이 보이는 관목 울타리가 있었으며, 그 아래로 인공 수로가 있었다. 일종의 운하였는데,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해자(垓子) 같았다. 자동차가 초승달 모양의 거리를 돌아 이 운하를 지나쳐 갈 때, 앵거스는 한 모퉁이에서 노점을 벌이고 군밤을 팔고 있는 한 사내와 다른 쪽 커브 끝에서 희미한 푸른색 옷을 입은 경관이 천천히 순찰 중인 것을 보았다. 저 높은 교외의 고독한 거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의 그림자라고는 이들 둘뿐이었다. 앵거스는 이들이 런던의 무언시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은 환상에 젖었다. 그에게는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 작은 자동차는 총알같이 달려서 스마이드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이 차의 주인은 마치 폭탄의 탄피라도 되는 양 차에서 훌쩍 튀어나갔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금술 달린 제복을 입은 키 큰 수위와 짧은 소매의 옷을 입고 있는 문지기에게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나 배달된 물건이 없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그런 질문을 받은 이래로 어떤 사람도, 그 어떠한 물건도 자신들을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스마이드와 다소 당황해하고 있던 앵거스는 로켓 같은 승강기를 타고 맨 위층까지 올라갔다.
“잠시만 들어왔다 가시지요. 웰킨이 보낸 편지들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의 탐정 친구를 데려오도록 하시지요.”
그가 벽 속에 감춰진 버튼을 누르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문이 열리자 길고 널찍한 홀이 보였는데, 그곳에서 유일하게 눈길을 끄는 것들이라고는, 재단사의 마네킹처럼 양쪽에 늘어서 있는 반쯤 인간의 형태를 한 기계들이었다. 재단사의 마네킹처럼 이것들도 머리가 없었고, 어깨는 쓸데없이 떡 벌어져 있는데다가 가슴은 비둘기 가슴처럼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을 제외하고는 역에 있는, 사람 키만 한 자동 판매기만큼도 인간의 모습과 닮지 않았다. 이것들은 접시를 나르기 위하여, 인간의 팔 구실을 하는 두 개의 커다란 갈고리가 달려 있었고, 구분하기 편하도록 황록색이나 주홍색 혹은 검정색 칠이 되어 있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이것들은 자동 기계에 불과했으며, 이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은 둘 다 그것들을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두 줄의 마네킹들 사이에 기계보다 훨씬 더 흥미를 끌 만한 무엇인가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찢어진 흰 종이 조각이었는데, 붉은색 잉크로 뭔가가 휘갈겨져 있었다. 민첩한 발명가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는 말없이 그 종이 조각을 앵거스에게 건네주었다.
돈으로 네명의 감시자를 사다
‘오늘 그녀를 만났다면, 너는 죽음을 당할 것이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스마이드가 조용히 말했다.
“위스키 한잔 하시겠소? 나는 한잔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플랑보 씨를 데려오는 편이 낫겠군요. 제가 보기에는 일이 위험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얼른 가서 그를 데려오겠습니다.”
“당신 말씀이 맞습니다. 가능한 빨리 모셔 오십시오.”
스마이드가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앵거스는 문을 닫으면서, 스마이드가 버튼을 뒤쪽으로 밀자 기계 인형들 중 하나가 쟁반에 술병과 술잔을 가지고 바닥을 스르르 미끄러져오는 광경을 보았다. 문이 닫히자, 저런 생명이 없는 하인들과 함께 저 작은 사내를 혼자 남겨 둔다는 것이 앵거스는 조금 마음에 걸렸다.
스마이드의 아파트에서 여섯 계단쯤 내려왔을 때, 앵거스는 양동이를 들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그는 짧은 소매옷을 입고 있었다. 앵거스는 가던 길을 멈추고 이 사내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면서 계단을 올라오는 낯선 사람이 없는지를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돌아와서 팁을 충분히 주겠다고 말하고 사내의 약속을 받아냈다. 아파트 건물의 현관으로 달음질쳐 내려온 앵거스는 그곳을 지키고 있는 수위에게도 같은 부탁을 했다. 수위에게서 이 건물의 출구가 하나뿐이라는 정보를 얻고 나니 일이 수월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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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일러스트는 1911년 오리지널 에디션에 수록됐던 시드니 세이모 루카스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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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그는 순찰 중인 경관에게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를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또, 군밤 1페니어치를 사면서 상인에게 여기에 얼마 동안 있을지를 물어보았다. 군밤 장수는 코트 깃을 세우더니, 눈이 내릴 것 같아서 일찍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저녁 하늘이 점점 잿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앵거스는 온갖 감언이설로 이 군밤 장수 사내를 그 자리를 떠나지 않도록 설득했다.
“당신이 팔고 있는 군밤을 먹으면서 몸을 녹이고 계십시오. 모두 다 먹어도 좋아요. 값을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여기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자건 남자건 어린아이건 할 것 없이 저쪽 수위가 서 있는 건물로 들어간 수상한 사람이 있었는지만 알려준다면 금화 일 파운드를 드리겠소.”
그러고 나서 앵거스는 재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어찌 되었든 스마이드의 방은 완전히 포위된 거야. 네 명이 모두 웰킨이라는 자와 한패거리일 수는 없는 일일 테니까.”
럭나우 아파트 단지는 히말라야 아파트 단지를 바라다보며 언덕의 아래쪽에 있었다. 사무실 겸용으로 사용하는 플랑보의 아파트는 일층에 있었으며, 모든 면에서 미국식 기계나 냉랭한 호텔의 사치스러움으로 가득한, ‘조용한 하인들’이 있는 아파트와는 극렬한 대조를 보였다. 앵거스의 친구인 플랑보는 사무실 뒤쪽에 있는 로코코풍으로 꾸민 개인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군도와 화승총, 동양의 골동품들, 이탈리아식 포도주 병, 야만인들의 요리 냄비와 같은 장식품들이 걸려 있었으며, 털이 북슬북슬한 페르시아 고양이와 작달막하고 보잘것없게 생긴 로마 가톨릭 신부가 있었다. 그중에서 신부는 특히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인 듯 보였다.
플랑보 탐정·브라운 신부와의 만남
“이쪽은 브라운 신부님이라네. 자네에게 인사시켜 주고 싶었지. 이거 정말 근사한 날씨 아닌가, 하지만 나 같은 남부 사람에게는 조금 춥구만.”
“그렇군요. 이제 곧 풀리겠죠.”
앵거스는 요란한 줄무늬가 있는 동양식 터키 의자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글쎄, 눈이 오기 시작하는군.”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군밤 장수가 예측했던 대로 어두워진 창밖 너머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저, 사실은 일이 있어 왔습니다. 아주 골치 아픈 일입니다. 플랑보 씨, 지척에 사는 한 남자가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은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쫓기고 협박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악당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앵거스는 로라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스마이드와 웰킨에 대한 이야기 전체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거리의 모퉁이에서 들린 불가사의한 웃음소리와 텅 빈 가게 안에서 분명하게 들렸던 유령의 소리까지 이야기했다. 그러자 플랑보는 점점 더 이야기에 빠져 들게 되었고 몸집이 작은 신부도 마치 방 안을 차지하고 있는 가구인 양 조용히 앉아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가 가게 유리창에 붙어 있던 우표 종이에 대한 부분에 이르자, 플랑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그의 그 떡벌어진 어깨가 방 안을 하나 가득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다면, 나머지 이야기는 그 친구네 집으로 가는 도중에 들었으면 좋겠네. 가능한 빠른 길로 가세나. 웬일인지, 한시도 지체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좋습니다. 지금까지는 안전할 테지만, 그게 좋을 듯합니다. 제가 네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그의 아파트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를 지키도록 해놓았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거리로 나왔고, 작달막한 신부는 마치 작은 강아지같이 얌전히 그들의 뒤를 뒤뚱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눈이 꽤 빨리 쌓이겠어.”
신부가 마치 잡담을 하는 것처럼 명랑하게 말했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가파른 길을 누비듯 지나는 사이, 앵거스는 그가 들은 이야기를 모두 전해주었다.
높이 솟은 아파트 단지의 초승달 모양의 길로 접어들자 앵거스는 자신이 세워놓은 네 명의 감시자들에게 주의를 돌릴 여유가 생겼다. 군밤 장수는 1파운드의 금화를 받으면서 자신은 아파트 현관으로 그 어떠한 방문자도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노라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하얀 눈 위에 찍힌 잿빛 발자국
경관의 태도는 더욱 강경했다. 그는 실크 모자를 쓴 악당이건 누더기를 걸친 악당이건, 모든 종류의 악당들을 다 겪어봤기 때문에, 수상쩍은 사람이 수상쩍은 사람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풋내기가 아니라며,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봤는데 다행히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금술이 달린 제복을 입은 수위에게로 갔다.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현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의 보고는 더욱 안심을 주었다.
“저는 공작님이건 청소부이건, 이곳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파트를 찾은 용건을 물을 권한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신사분께서 나가시고 나서는 물어보고 싶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지 뭡니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거의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던 브라운 신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는 도로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가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눈이 내리기 시작한 이래로 아무도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간 사람이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플랑보 씨의 집에 있을 때니까 말입니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권위를 내세우며, 수위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이건 뭐지요?”
신부는 이렇게 말하면서 물고기처럼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플랑보는 프랑스인다운 과장된 놀란 몸짓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왜냐하면, 금술 달린 제복을 입은 사내가 지키고 있던 입구의 중앙에서, 사실은 그 거만하게 서 있는 커다란 수위의 다리 사이로, 하얀 눈 위에 잿빛 발자국이 선명하게 죽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앵거스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 올라갔고 플랑보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브라운 신부는 이 사건에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눈이 덮인 거리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플랑보는 커다란 어깨로 문을 부수기라도 할 태세였다. 하지만, 직관은 떨어지지만 더 합리적인 스코틀랜드 출신의 청년 앵거스는 문틈을 더듬어 감추어진 버튼을 찾았다. 그가 버튼을 누르자, 문이 천천히 저절로 열렸다.
그러자 전과 다름없는 빽빽이 들어찬 내부가 보였다. 아직은 심홍색의 석양이 비쳐 들고 있기는 했지만, 홀은 더 어두워졌고 이런저런 목적으로 제자리에서 움직였던 한두 개의 머리 없는 기계들이 황혼 빛에 물든 방 안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칠해진 그 기계들은 저물어가는 황혼 속에서 모두 음산하게 보였다. 일정한 형태가 없는 기계들의 모습이 오히려 더 사람의 모습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계들 사이에, 붉은 잉크로 휘갈겨 쓴 종이가 떨어져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잉크병에서 엎질러진 것 같은 붉은 자국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붉은색 잉크가 아니었다.
붉은 피, 그러나 시체도 사라졌다
이성과 폭력의 프랑스적인 조화를 보이며, 플랑보가 한마디 내뱉었다.
“살인이다!”
그러고는 안쪽으로 뛰어들어 5분 안에 찬장을 비롯한 구석구석을 탐색했다. 하지만, 시체를 찾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이시도르 스마이드는 죽었건 살아 있건 간에 그곳에는 없었다. 여기저기를 이 잡듯이 찾아다니던 두 사람은 비 오듯 땀이 흐르는 얼굴을 하고 바깥쪽 홀에서 만나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보게.”
플랑보가 흥분한 나머지 불어로 말했다.
“자네가 찾는 그 보이지 않는 살인자는 자신뿐 아니라 살인을 당한 사람도 보이지 않게 하는 재주를 가졌나 보군.”
앵거스는 마네킹 같은 기계들로 가득 차 있는 어둠침침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영혼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켈트인다운 예감에 그의 온몸이 떨렸다. 사람 크기만 한 기계 인형들 중 살해당한 사내가 쓰러지기 직전 불러낸 듯한 인형 하나가 핏자국 바로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었던 것이다. 팔을 대신해서 시중을 들던, 높은 어깨에 붙은 갈고리 중 하나가 약간 들려 있었다. 앵거스는 갑자기 저 불쌍한 스마이드가 자신이 만들어낸 자식 같은 쇠붙이 인형에게 맞아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끔찍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물질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 기계들이 그들의 주인을 살해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단 말인가?
“먹어 버렸을까?”
그의 귓가에 악몽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인간의 몸이 머리 없는 기계에 의해 으깨어져 그 안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는 광경이 떠오르자 앵거스는 순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애써 안정을 되찾은 앵거스는 플랑보에게 말했다.
“할 수 없군요. 이 불쌍한 남자는 바닥에 붉은 흔적만 남기고 구름처럼 증발해 버렸네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있는 일이건 그렇지 않은 일이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뿐이네. 아래로 내려가서 브라운 신부에게 이야기해야겠어.”
그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한번 단연코 어떠한 침입자도 들이지 않았다는, 양동이를 든 사내의 다짐을 들었다. 그러고는 아래층에 있는 수위와 아직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군밤 장수를 불러 그들이 얼마나 주의 깊게 감시를 했는지 확고하게 주장하는 말을 다시 한번 들었다. 그러나 앵거스가 네 번째 확신을 다시 받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네 번째 감시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 가방이 연한 갈색이라면…”
앵거스는 초조하게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경관은 어디 있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내가 길 아래쪽에 뭘 좀 조사하러 보냈네. 조사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돼서 말이야.”
“그래요? 가능한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위층 사내가 살해됐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든요.”
앵거스가 급히 말을 했다.
“어떻게 말인가?”
신부의 물음에 플랑보가 대답했다.
“신부님, 제 생각에는 이건 저보다는 신부님이 처리해야 할 영역인 것 같은데요. 친구건 적이건 간에 아무도 저 집에 들어간 사람은 없는데, 스마이드는 사라졌습니다. 마치 요정들에게 잡혀가기라도 한 것같이 말이지요. 이것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저는 ….”
순간, 푸른 옷을 입은 커다란 체구의 경관이 초승달 모양의 길 모퉁이를 돌아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경관은 곧장 브라운 신부에게로 왔다.
“신부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저 아래쪽 운하에서 시체를 찾았습니다.”
“그가 저 아래로 달려가 물에 뛰어들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앵거스가 물었다.
“아래로 달려 내려온 게 아닙니다. 물에 빠져 죽은 것도 아닙니다. 가슴이 흉기에 찔린 채 죽어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았습니까?”
플랑보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 내려가 보세.”
신부의 말에 따라 셋은 초승달 모양의 길을 따라갔다. 끝에 다다르자 신부가 말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경관에게 뭘 좀 물어본다고 하고는 깜빡했군그래. 경관에게 연한 갈색 가방을 찾았는지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연한 갈색 가방은 왜요?”
앵거스가 놀라서 물었다.
“그게 다른 색깔의 가방이라면, 이 사건은 다시 조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네. 그게 연한 갈색이라면, 이 사건은 여기서 끝이 나는 거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제 생각에는 아직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앵거스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아무도 없다’의 여러가지 의미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그들은 활기차게 앞서 가는 브라운 신부를 따라 높은 초승달 모양의 길 아래쪽에 있는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내려갔다. 마침내, 브라운 신부가 아주 애매하게 서두를 꺼냈다.
“자네들이 이걸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만 모든 일은 추상적인 곳에서 시작되기 마련이지. 더군다나 이 사건은. 사람들이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사람들은 질문한 사람이 의미하는 것 혹은 그들이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대답을 한다네. 어떤 부인이 시골 저택의 부인에게 ‘댁에 함께 지내는 분이 계시나요?’라고 물어본다고 가정해 보세. 이 질문을 받은 부인이 ‘네, 하인 한 명, 마부 세 명, 그리고 하녀 한 명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지는 않을걸세. 비록 하녀가 방 안에 있고 하인이 그녀의 바로 뒤에 있다 해도 말이야. 그 부인은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함께 지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도 없다’가 바로 이 사건에서의 ‘아무도 없다’일세. 그러나, 한 의사가 전염병에 대하여 조사를 하면서 ‘댁에 함께 지내는 분이 계시나요?’라고 묻는다고 가정해 보세. 이 부인은 하인과 하녀, 그 밖에 모든 사람들을 기억해낼걸세. 이것이 언어가 쓰이는 방식일세. 진실한 대답을 들었다 해도, 문자 그대로 보면 질문에 맞는 대답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거지. 자, 네 명의 정직한 증인들은 저 아파트로 들어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네. 이때,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 사람들의 말은 정말 그곳으로 들어간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었네. 그들은 질문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안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걸세. 하지만 한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나왔네. 그곳을 지켜보고 있던 네 사람이 모두 알아채지 못했던 것뿐이지.”
“보이지 않는 인간이란 말입니까?”
앵거스가 그의 붉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심리적으로 그렇단 말이지.”
잠시 후 신부는 자신의 길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전과 다름없이 겸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곰곰이 생각하기 전에는 그런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해낼 수 없을걸세. 그게 바로 그자의 영리함이지. 그러나 나는 앵거스의 얘기를 들으면서 두세 가지의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 범인의 윤곽을 알게 되었네. 첫째로, 웰킨이라는 사내는 한없이 걷기를 좋아했지. 그리고 유리창에 붙어 있던 건 바로 우표 종이 아니었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아가씨의 말이 결정적이었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으니까. 화내지 말고 잘 듣게.”
신부는 앵거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것을 눈치채고는 덧붙였다.
“물론 그녀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그렇지 않아. 그녀는 편지를 받기 직전과 편지를 읽을 때 거리에 혼자 있었다고 했네. 하지만 그렇지 않아. 누군가가 반드시 그녀 가까이에 있었어야 해. 심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말일세.”
“그녀 가까이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뇨, 그게 무슨 뜻이죠?”
앵거스가 물었다.
“왜냐하면, 통신용 비둘기를 이용하지 않는 한 그녀에게 편지를 전해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자네는 정상이야, 관찰력이 부족할 뿐
“그러니까 신부님 말씀은, 웰킨이라는 자가 자신의 연적이 보낸 편지를 그녀에게 직접 전했단 말인가요?”
플랑보가 물었다.
“그렇지. 웰킨이라는 자가 직접 연적의 편지를 그녀에게 전했다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아. 더 이상은 못 참겠습니다. 도대체 이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자지요? 심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그 사내는 평소에 어떻게 변장을 하고 다닌다는 겁니까?”
플랑보가 폭발하듯 말했다.
“그자는 붉은색과 초록색, 그리고 금색이 반짝이는 다소 훌륭한 옷을 입고 있다네.”
신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눈에 띄는 화려한 옷을 입고는 여덟 개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히말라야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던 것이네. 그곳에서 스마이드를 잔인하게 죽인 다음 다시 그 시체를 팔에 안고 내려와서 ….”
“신부님.”
앵거스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 아니면 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요?”
“자네는 정상이야. 단지 관찰력이 부족할 뿐이지. 이를테면, 당신은 이런 사내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신부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지나가던 한 평범하게 생긴 우편 배달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앵거스와 플랑보는 나무 사이로 그가 지나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도 우편 배달부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 하지만 이들이라고 열정이 없겠나? 게다가 몸집이 작은 시체라면 아주 쉽게 집어넣을 수 있는 커다란 가방도 가지고 다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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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신부 전집(북하우스 펴냄) 1권 <결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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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뒤를 돌아볼 줄 알았던 우편 배달부는 머리를 숙이고 달아나려다가 정원의 울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는 다분히 평범한 외모의 호리호리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어깨 너머로 그 놀란 얼굴을 돌렸을 때, 세 사람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는 사팔뜨기 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플랑보는 산더미 같은 업무를 처리하러 군도와 보랏빛 양탄자, 그리고 페르시아 고양이가 있는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존 턴불 앵거스는 제과점의 여인에게로 되돌아갔는데, 이 생각 없는 청년은 어떻게 하면 그녀와 단둘이 안락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운 신부는 반짝이는 별빛 아래 하얗게 눈이 덮인 언덕을 몇 시간이나 이 살인자와 함께 걸었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결코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체스터턴의 단편 <보이지 않는 남자>는 브라운 신부 전집(북하우스 펴냄) 1권 <결백>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은 (주)북하우스의 동의 아래 전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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