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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현의 신작 추리소설- 어느 채식주의자의 블로그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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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한차현의 신작 추리소설- 어느 채식주의자의 블로그 살인사건
2007/08/02 아내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분명하다. 죽을 만큼 절망한 것은 분명하다. 죽일 만큼 분노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살인이라니. 그건 채식주의자가 꿈꿀 행동이 아니다. 집 나서기 전,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의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이거 봐. 안 일어날 거야? 아내는 자는 사람 같기도 했고 뾰로통해서 자는 척 눈 감은 사람 같기도 했다. 장마 끝나고 여름 더위가 제대로이다. 이제 빠른 속도로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할 것이다. 살았을 때 끊임없이 체세포가 분열하고 심장이 수축이완 운동을 했듯 말이다.
아내가 죽은 뒤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원래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콩밥 먹던 마리 앙투아네트라면 내 혈관에 감염된 공포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다니. 정말이지 이건 11년차 채식주의자가 감당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트래비스를 만나러 가는 2호선 열차 안은 한산하다. 휴가철이라서일 것이다. 어떤 사람일까. 아직 한 번도 만난 일 없는 그를 나는 안다. 모르지만 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는, 아내의 죽음에 나만큼이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그로서는 내 주장에 동의할 마음이 없겠지만. 아내의 죽음 앞에 그와 나의 큰 차이가 있다면, 아직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기충격기와 등산용 폴딩나이프. 최루 가스 분사기. 청색테이프 한 통. 노트북 가방에 노트북 대신 들어 있는 물건들이다. 가스 분사기가 방심한 상대의 중심을 일순 허물어뜨리는 용도라면, 3만 볼트 전기쇼크는 이후의 거센 저항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가 누구건, 제대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과연 이 물건들을 노트북 가방에서 꺼낼 순간이 있을지 아직 모르겠다. 그를 만나러 가는 지금 머릿속은 라면과 김밥을 잔뜩 먹고 토한 양변기 속처럼 복잡하다.
2007/07/22 일요일. 초인종이 두 번째로 울릴 때 나는 화장실에 있었다. 방에서 나온 아내가 현관문 열어주는 기척이 들렸다. 바지를 추켜올리며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현관 앞에 선 아내는 누군가와 대화 중이었다. 이웃집 여자 같았다.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무심코, 반쯤 문 열린 아내의 방 안에 시선을 주고 말았다. 어째서 그랬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책상 위 모니터에 낯익은 여자 얼굴이 보였다. 영화 베티블루 37°2의 포스터이다. 맹세코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무심코 시선을 돌리고 말았을 것이다. 베아트리체 달이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북향 창이 난 아내의 방. 책상에 기대 서서 마우스로 화면을 움직여 본다. 사랑, 그보다 숨 막히는 것들. 그런 이름의 블로그이다. 이런 걸 다 했었나?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그때 들렸다. 슬그머니 방을 나서다가 문 앞에서 아내와 마주쳤다. 아내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무심히 꿰뚫고-거기 내가 없다는 듯-지나가 내 뒤의 어느 지점을 향하는, 그런 눈으로. 그리고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절꺽.
2007/07/23 사무실 컴퓨터로 베티블루의 블로그를 다시 찾았다. 궁금해서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는 아니었다. 첫 포스팅을 시작한 것이 작년 11월. 그간 다녀간 방문자들 숫자만 5만 명이 넘었다. 나는 50,233번째 손님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열심이었던가. 직장 생활에 대해, 일상의 지루함에 대해, 책장을 막 덮은 번역 소설에 대해, 점심시간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갔던 음식점에 대해, 한창 내한 공연 중인 영국 록그룹에 대해, 40년 전 숨진 남미의 혁명가에 대해 말하는 블로그의 주인은 아내가 아니라 베티였다. 베티라는 이름을 쓰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였다. 거의 매일 새로운 포스트에 글과 음악과 사진과 동영상을 선보이면 베티만큼이나 이상한 이름을 가진 방문객들이 어김없이 찾아와 친밀한 덧글을 남겼다. 꼬리를 물고 덧글이 이어지면 베티는 거기 일일이 응대하는 답글을 달아주었다. 집에 놀러온 손님들에게 차와 과일을 대접하듯 말이다. 당최 공감이 닿지 않는 세계를 시무룩이 거닐던 즈음이다. 인터넷 접속이 끊기듯 느려지더니, 블로그에 새로운 글과 그림이 둥실 나타났다.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어리둥절하던 나는 깨달았다. 충무로에 있을 아내가 지금 막 새로운 포스트를 만들어 올렸을 것이다. 비 오는 월요일, 이라는 제목에 이어 베티는 사무실 창밖 비 오는
오후 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배경 음악으로 올린 빌 더글러스(Bill Douglas)의 연주가 퍽 울적했다. 기분 묘했다.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상쾌하지도 않았다. 전화를 걸어 아는 체할까. 엉뚱한 상상에 식도가 간질거렸다. 이봐, 창밖의 비 오는 거리 풍경이 어때? 보기 좋아?
사진 게시판.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 수십 컷이 올려져 있었다. 아침 출근길, 운전석에 앉아 찍은 남산 1호 터널 주변. 53년 전통이라는 칼국수집 앞에 길게 줄을 선 회사원들. 잔뜩 어질러진 사무실 책상 위. 낯설도록 낯익은 피사체도 있었다. 고양시 화정의 반가운 얼굴들. 그런 제목의 사진을 발견한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초록빛 선연한 봄의 공원이다. 정자나무 주변에 다섯 사람이 사이좋게 모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낮술을 한잔씩 걸쳤는지, 한없이 밝은 표정이다. 세 여성 가운데 체구가 가장 작은 베티가 사진 왼쪽에서 활짝 웃고 있다. 나로선 본 기억 없는, 놀랍도록 행복한 웃음이었다. 블로그 하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다니는구나. 그렇겠지. 그렇기도 하겠지.
2007/07/27 마지막 장맛비가 내리던 금요일. 자정 넘어서까지 아내는 귀가하지 않았다. 회식이 있어 늦겠다는 전화가 온 게 9시였다. 술을 못 하는데다 채식주의자인 나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훈제치킨에 생맥주를 마시고 다음날 깊은 환멸에 빠진 낯빛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반복되는 일상을 좀처럼 이해 못하는 편이다. 아내에 대한 경우가 바로 그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5백 원짜리 단팥빵과 오렌지주스로 늦은 저녁을 해결하고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집에 가져온 회사 일을 끼적였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연예계 가십 기사를 읽었고 스포츠신문의 연재만화를 보았다. 휴대폰을 바꿀 생각으로 쇼핑몰도 기웃거렸고 온라인 게임에 접속해 1시간 넘게 포커를 쳤다. 베티의 블로그에도 들어갔다. 사랑, 그보다 숨 막히는 것들. 며칠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들이 여럿 올라와 있었다.
비공개 게시판. 글을 올리면, 글 쓴 당사자와 관리자만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누가 언제 뭘 올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남들에게는 비밀로 블로그 주인에게만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 유용한, 유용할, 예의 게시판에 문득 주목하고 만다. 빌어먹을. 뒤틀린 감정 하나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호기심이었다. 증오에 가까운 호기심이었다. 대관절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공개 게시판에서도 그렇게나 다정한 사랑과 우애가 넘쳐나는데 비공개라면 얼마나 더할까. 확인할 방법은 하나다. 아이디 해킹, 아내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로그인하는.
아이디는 알고 있다. 블로그 주소
http://blog.weland.com/bettyblue32의 bettyblue32이다. 그럼 패스워드는? 주민등록번호 뒤 일곱 자리를 적어본다. 아니다. 아파트 주소? 아니다. 핸드폰 번호? 아니다. 통장 비밀번호? 역시 아니다. 아무 힌트도 없이 패스워드를 알아내는 노력이 얼마나 말도 되잖을 노릇인가를 실감한다. 다시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호기심. 억센 손아귀가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다.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 나는 잘 모른다. 솔직히 말해 그렇지 않은 편이다. 더 솔직해지자면, 그렇건 아니건 이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화내고 욕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무관심보다도 끔찍한 것이 있다. 무관심한 관심이다.
결국은 거짓말처럼 패스워드를 알아내고 말았다. 그게 행인지 불행인지 미처 알지 못하던 즈음이었다. 작년 봄 마지막으로 찾았던 부천 처가가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초월적 존재의 의지가 작용했다면, 누군지 장차 나와 아내 사이에 찾아올 파국에 별 관심이 없는 작자였으리라. 수첩을 뒤져 처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전화번호 열자리를 패스워드 삼아 입력하고 엔터키를 쳤다.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 오류입니다. 아닌가? 다시, 뒤의 네 자리 9128을 적었다. 그리고 엔터. 오오, 과연. 모니터에 다음과 같은 글자가 나타났다.
bettyblue32님으로 입장하셨습니다.
새벽 두 시가 가까워서이다. 비가 언제 그쳤을까.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선 아내는 늘 그렇듯 나 왔어, 한숨 쉬듯 말했다. 화장실 문이 닫히고 수돗물 트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 집에 술 냄새가 퍼지는 것 같았다. 침대 구석에 돌아누운 아내는 몇 차례 뒤척임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숨소리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려, 가만히 안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깨에 힘이 빠졌다. 무서웠다. 너무 놀라워, 무서웠다. 비공개 게시판.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고 자기 사는 이야기를 건네는 사적이고 은밀한 분위기들. 수많은 방문자 가운데 유난히 도드라지는 인물이 있었다. 트래비스. 그 이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존재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문자들의 글이 10개면 그가 올리는 것이 7∼8개였다. 매일 아침 안부전화를 하듯, 매일 점심 꽃다발을 내밀듯, 매일 저녁 달콤한 키스를 건네듯, 사랑이 시작된 연인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을 찾아와 다정한 인사를 남기고 가는 이, 내가 아니라 트래비스였다.
… 흐린 아침이군요. 전 막 사무실에 출근했어요. 베티님은? … 보내준 음악 잘 들었어요. 이달의 주제곡 삼을까 해요. … 어제 잘 들어갔나요? 보기로 한 영화, 못 봐서 어떻게 하나. 다음 기회엔 꼭. … 베티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요. 나, 실수하는 건가요? … 점심에 같이 밥 먹어요. 내가 사무실 앞으로 12시 40분까지 갈게요. … 비가 옵니다. 베티님 생각이 자꾸 납니다. … 보고 싶어요. 토요일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몇달 새 열 번 정도 만난 모양이다. 만나 무엇을 했는지 게시판의 글만 살펴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아니다. 보지 않고도 알 일이었다. 입이 말랐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게, 도대체 이게 뭐지? 사랑과 전쟁? 4주 후에 뵙겠습니다?
내 안의 무엇인가,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2007/07/31 미안한 일이지만 아내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미안하지만, 기억이 확실치 않다. 여러 정황에 비추어 아마 그랬으리라-는 예상이 가능할 뿐이다. 그날도 아내의 귀가가 늦어지고 있었다. 자정 전에 돌아올지 새벽 2시를 넘길지 알 수 없었다. 아홉시 뉴스를 보며 혼자 저녁을 먹었다. 사채 독촉에 시달리던 30대 남성이 아내와 생후 15개월 된 딸과 함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경찰은 …. 식탁을 치우고 이를 닦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오래 이어졌고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녹음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사랑, 그보다 숨 막히는 것들. 이제 익숙해진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관리자로 로그인한다. 비공개 안부 게시판을 연다.
트래비스(ElectricLand) No 866. 2007/07/30 21:05
뭐 해요 지금? 난 아직 사무실이에요. 월요일부터 야근이라니. 지친다. 휴가철이라는군요.
베티(bettyblue32) No 867. 2007/07/30 21:32
요새 바쁜가 봐. 저녁은 먹었죠? 아, 동해바다 보고 싶다.
트래비스(ElectricLand) No 868. 2007/07/30 23:17
지금 막 집에 돌아왔어요. 불 꺼진 집 안에 들어가다가, 당신 생각을 잠깐 했어요. 우리 그럼, 언제 동해 갈까요?
베티(bettyblue32) No 870. 2007/07/30 23:54
상황 봐서.^^ 그럼 잘 자요. … 내일 만나기로 한 거 안 잊었죠?
어제 늦은 저녁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이다. 녹슨 칼날이 가슴을 길게 베었다. 쓰리고 아픈 후회가 몰려들었다. 베티블루 37°2의 포스터에 홀려 아내의 방을 기웃거리지 않았더라면. 관리자 패스워드를 우연히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이 모든 것을 영영 모르는 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어김없이 자정이 지나갔다. 환경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텔레비전 심야토론이 한창일 때 현관문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베티는 다소 지친 얼굴이었다.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내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추한 변명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맹세코,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스타킹 양말을 벗고 욕실에 들어서는 아내의 팔을 잡아 세웠다. 얼마 만에 만져보는지 모를 아내의 몸은 부드러웠다. 지금 몇 신 줄 알아. 조금 놀라는 눈치다. 그럴밖에, 아내로서는 내 화난-화가 났건 기분이 좋건 우울하건, 어떠한 감정이 섞인-얼굴을 참으로 오랜만에 볼 터였다. 당신, 나한테 뭐 할 이야기 없어? 그러자 아내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이 팔이나 좀 놔. 아파. 아내의 얼굴 속에, 베티가 있었다. 뒷머리가 아뜩해졌다. 아프다고? 나보다 더? 버럭 소리쳤다. 정신병원 철창을 붙들고 선 사내처럼. 이런 경우 먼저 폭발하고 흥분하는 쪽이 불리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어쩔 것인가, 내가 원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비극은 그렇게 찾아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대체 내가 당신에게 뭐냐고 쏘아붙인 것 같다. 도대체 나한테 당신이 뭐냐고. 급기야 블로그에 대해서도 입에 올렸다. 트래비스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아내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놀랐을까? 물론 그랬을 테지. 조금도 즐겁지 않은 얼굴로 길게 한숨을 뱉어낸다. 마주 선 사이에 놓인, 무섭도록 막막한 거리에 와락 엎어지고 만다.
… 당신, 정말로 수준 이하야. 알아?
그리고 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2∼3분? 짧은 순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되 쓰러져 기절한 것은 아니었다. 단두대에 머리를 잃은 팔다리가 아직 살아서 춤추듯 꿈틀거리듯, 육신만은 여전히 살아서 어떤 행동을 벌이고 말았을 터이다.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쨍그랑 와당탕, 뭔가 부셔지고 넘어가는 소리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린-이런 표현은 나 역시 달갑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나는 눈앞에 널브러진 장면에 허,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아내가 목욕탕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있다. 두 눈을 뜬 채로. 변기 가장자리에 밝고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 왼쪽 손목이 뻐근했다. 할 줄도 모르는 주먹질을 했던 모양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안에, 빌어먹을, 도대체 어떤 이상하고 괴상한 것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2007/08/01 죽은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집을 나섰다. 밤을 꼬박 새운 덕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 출근할 수 있었다. 가로수도 약국 간판도 사거리 모퉁이에서 토스트를 파는 트럭도, 늘 보던 아침 출근길 풍경들이 어쩐지 낯설었다. 그래. 문제가 있다면 세상이 어제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속편한 믿음일 것이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팀장에게 찾아가 3일간의 휴가를 신청했다. 아이고,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태어나서부터 줄곧 걱정만 하고 살아온 사람 같은 얼굴로 그가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죄송합니다. 비장한 작별인사를 건네려다가 꾹 참고 도망치듯 회사를 나섰다. 오후 햇살이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여름 한낮의 정물 같은 명징. 분식집에 들어가 시큼한 열무냉면을 사 먹고 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걸었다. 29도를 웃도는 여름 날씨였다. 안방 침대에 잠들어 있을 아내의 시신을 생각했다. 통상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게 될지 아직은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사체 유기에 관한 지저분한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전에 전화 걸었던 총포사에 찾아갔다. 전기충격기와 최루 가스 스프레이는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물건들을 노트북 가방에 넣고 다시 거리를 걸었다. 생각할수록 새록새록 어이가 없었다. 맙소사, 이 상황에서 이토록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다니. 연쇄살인범처럼 청부살인업자처럼 태연히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니. 내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밤 10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다. 불 꺼진 고요. 아내는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나갈 때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비공개 게시판. 어김없는 안부 글이 올라 있었다.
트래비스(ElectricLand) No 866. 2007/08/01 10:11
굿모닝! 오늘도 좋은 하루예요.
트래비스(ElectricLand) No 896. 2007/08/01 22:23
하루 종일 왜 이렇게 잠잠한 건가요. 우울증이 또?
트래비스(ElectricLand) No 866. 2007/08/01 23:34
무슨 일 있어요? 전화도 안 받고.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건가요. …… 답답해요.
베티의 블로그에 들어선 나는 베티가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베티(bettyblue32) No 867. 2007/08/01 23:56
좀 바빴어요. 걱정시켜 미안해요. … 우리, 내일 만나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잠실 괜찮죠? 저번에 만났던 거기에서.
2007/08/02 잠실역 오후. 놀이공원으로 향하는 길, 고뇌하는 거인상 앞이다. 시계탑 주변 벤치 그늘에 사람들이 보인다. 가방을 멘 고등학생들. 휴지통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 생활정보신문을 뒤적이는 노인. 유모차를 붙들고 선 젊은 엄마. 회색 반팔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들. 그 밖의 사람들. 저 가운데 트래비스가 있다. 오지 않을 베티를 기다리면서. 아내를 죽게 만든 내가 나만큼이나 아내의 죽음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인물을 만나는 것은 그 이유를 따질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멀지 않은 내 미래에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면 더욱. 다시 사람을 죽일 생각 따위는 물론 없다. 살인이라니. 절망스러운 죄를 지었지만 그건 돌이키지 못할 과오일 뿐이다.
여름 오후 햇살이 불같이 쏟아지고 10차선 찻길의 소음은 정신이 없다. 여기 지금, 어째서 이렇게 서 있는 거지? 어지럽다. 이틀 동안 잠을 못 잤다. 지금이란 상황이, 못 견딜 정도로 낯설고 생경하다. 안방 침대에 누워 있을 아내를 생각했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제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할 것이다. 살았을 때 끊임없이 체세포가 분열하고 심장이 수축이완 운동을 했듯, 생명이 끊어지면서 체내의 박테리아 번식이 급하게 증가하고 있을 것이다. 그 냄새에 찾아든 쉬파리 집파리가 콧구멍과 귓구멍과 옆머리의 상처에 알을 낳고, 얼마 후면 허연 구더기들이 적당히 상한 살을 파먹을 터였다. 메스꺼웠다. 구토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 견딜 수가 없구나. 아랫배에 칼이 박힌 사람처럼 불편한 걸음을 옮겼다. 빈 나무벤치에 주저앉았다. 고뇌하는 청동 거인이 그늘을 내어주고 있다.
바지주머니에서 밝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 벨소리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내 것이 아니다. 아내의 핸드백에서 찾아낸 물건이다. 벨소리가 계속 울고 있다. 트래비스일 것이다. 오지 않는 베티를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주인 잃은 휴대폰 울음소리가 계속되자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린다. 이걸 받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소리가 뚝 끊겼다.
“저어, 저기요.”누군가 다가왔다.
“그 전화, 실례지만 본인 거 맞으세요?”그다지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다.
“아닌데요.”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기증이 일었다.
“혹시, 어어, 트래비스님 되시나요.”
“… 맞아요. 어떻게 아시죠?”
나는 놀란다. 멈칫 놀라고 만다. 청회색으로 물들인 머리칼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 베티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 어째서 그 전화기를.”
가녀린 목소리와 그만큼이나 여성스러운 외모. 잘생겼다. 티브이 오락프로그램에 나오는 애들 같다. 스물다섯이나 되었을까. 베티와 트래비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쉽게 떠오르는 장면은 없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몹시 아프다. 행복했을까. 쓰리고 아픈 후회가 몰려든다. 베티블루를 알지 못했더라면. 이 모든 것을 모르는 채 살아갈 수 있다면.
“저기요. 죄송하지만, 누구세요?”더는 침묵하고 있을 수 없다.
“직장 동료입니다. 부탁을 받고 대신 나왔습니다.”
“무슨 부탁을요?”
“본인 대신 좀 나가 달라고. 문제가 좀 있거든요. 그래서.”
“문제요? 무슨 문제가.”
석연치 않은 얼굴. 더웠다. 바람도 없는 날이었다. 등줄기에 주르르 땀이 흘렀다. 덥고 끈적끈적하니 절로 짜증이 일었다.
“큰일은 아닙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내 안에 숨어 있던 이상하고 괴상한 무엇이 꿈틀, 잠 깨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시죠. 그분 계신 곳을 제가 압니다.”
노트북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8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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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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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현
서울 동대문 출생. 장편소설 <괴력들>을 발표하며 문단에 들어섰다. 장편소설로 <여관> <왼쪽 손목이 시릴 때> <영광전당포 살인사건> 등이 있으며 <대답해 미친 게 아니라고> <사랑이라니, 여름 씨는 미친 게 아닐까> 등의 소설집을 냈다. 낮에는 소설 쓰고 밤 되면 술을 마신 지 10년 가까이 된다.
h7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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