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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08 16:47 수정 : 2007.08.08 20:54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

[매거진 Esc]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

짝짓기를 계기로 탄생하는 집단이 가족임에도, 가족이 있는 풍경과 연애가 있는 풍경은 오이와 당근처럼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연애는 열정과 성애의 세계고, 가족 관계는 관성과 양육의 공간이기 때문일까. 젊은이의 로맨스를 그리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도 가족의 존재를 편의적으로 생략하는 경우가 적잖다.

사랑 때문에 살고도 싶고 죽고도 싶었던 경험이 없다면 <기쁜 우리 젊은 날>과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혜린(황신혜)을 향한 영민(안성기)의 독실한 사랑과 더불어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을 특별한 멜로드라마로 만드는 요소는 영민과 그 홀아버지(최불암)의 특수한 관계다. 복종이건 저항이건 ‘권력’이 게재된 한국 영화 속 대부분 부자 관계와 달리, 영민 부자는 마치 모녀처럼 동거한다. (이른바 ‘결손’ 가정은 바로 그 결핍 때문에 유연하게 기능하기도 한다.) 영민은 가장 내밀한 감정마저 아버지에게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영민이 혜린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처음 아는 사람은 혜린이 아니라 아버지다. 엄마에게 용감히 구애했던 아버지를 본받아 드디어 영민은 데이트를 청한다. 2년 전 자신이 나온 연극에 구경 온 그녀를 처음 보았노라고 남자는 말문을 연다. 혜린이 환한 목소리로 대뜸 떠올린다. “아, 그 대사 잊어버렸던 분? 그래서 공연이 중단됐었죠?” 그래도 영민은 준비된 말을 꺼낸다. “사랑합니다.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맞은 편의 아름다운 천사가 까르르 웃는다. 영민은 어설프게 따라 웃는다.

그날 밤 내복 바람으로 잠 못 이루던 아버지는 만취한 아들을 맞이한다. “돈은 모자라지 않았니? 얘, 그 여학생이 뭐라던?” 영민은 세면대에 위액을 게워낸다. “제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인대요.” “그거, 잘 됐구나.” 문득 아들이 묻는다. “그런데, 왜 그 아가씨가 절 보고 깔깔 웃지요?” 등을 두드려주던 아버지가 나직이 답한다. “그야, 널 좋아해서겠지.” 방이 하나뿐인 집인 듯, 영민의 침대는 거실에 있다. 아들이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운 후에도, 카메라는 자리를 뜨지 않고 어두운 집안을 지켜본다.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노인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침대로 다가가 천천히 아들의 넥타이와 안경을 벗긴다. 그리고 난로를 열어 불기운이 넉넉한지 살핀 다음, 화면 귀퉁이로 터덜터덜 사라진다. 아버지는 아들의 쓰라린 하루가 언젠가 ‘기쁜 젊은 날’로 기억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관객들은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에서 유사한 교감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

영민 아버지의 모델은 감독의 부친이었다고 한다. 영민과 배창호 감독이 사랑에 관해 유보 없는 믿음을 갖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간이 흐른 후, 영민은 혼을 바쳐 사랑한 여인을 여의고, 그녀가 남긴 아이와 나란히 햇볕을 쬔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그런 오후가 있었으리라. <기쁜 우리 젊은 날>은 고독한 사랑의 대물림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씨네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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