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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법칙>(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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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게임의 법칙>(1994) 아직 핸드폰이 손목시계만큼 흔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멀리 떨어진 타인과 ‘교신’ 중인 도시인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급한 전언이 있거나, 가족과 동료가 듣지 않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이들은, 좁은 유리상자로 들어가 웃고 성내고 속삭이고 허세를 떨었다. 그래서 무언극 배우처럼 보이곤 했다. 거리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공중전화 부스는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한 독백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은 따로 공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아무 데서나 중얼거리고 긴급하지 않은 말의 부스러기를 쉴 새 없이 입과 손가락으로 타전한다. 독백은 이제 독백이 아니게 되었다. 한국 영화에도 공중전화 부스가 있는 인상적인 풍경이 여럿 있다. <게임의 법칙>의 마지막 장면은 그중에서도 첫손에 꼽힌다. 주인공 이용대(박중훈)는 신문에서 본 조폭 두목 유광천(하용수)을 찾아 무작정 상경한 싸움꾼이다. 용대는 “알고 보면 마음은 여린 터프가이” 따위가 아니라, 김동리의 <붉은 산>에 등장하는 ‘삵’에게 견줄 만한 진짜 나쁜 남자다. 타인과 제대로 대화하는 법은 아예 모르고 수틀리면 패고 짓밟기 일쑤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오연수)와의 섹스도 강간하듯 할 줄밖에 모르는 용대는 급기야 애인 태숙을 술집에 팔아 버린다. 주먹으로 출세만 하면 모든 과오와 빚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그는 그의 목표와 수단이 상충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한다. 앞뒤 가리지 않는 헌신으로 보스의 눈에 잠시 들었던 용대는 얼마 후 같은 이유로 용도 폐기된다. 야수를 오래 기르려는 조직은 없다. 자신이 일회용 소모품이었음을 용대가 어렴풋이 깨달을 즈음, 유광천에게 “무식한 놈”이 필요한 성가신 일이 생긴다. 수표를 받은 용대는 예전이라면 던지지 않았을 질문을 던진다. “누굽니까? 꼭 죽여야 됩니까?” 운명의 밤, 서울 하늘에는 석가 탄신을 기리는 연등이 탐스럽게 피어난다. 반지하층 천창으로 간신히 비껴 들거나 네온사인으로 분칠한 빛이 고작이던 <게임의 법칙>에서 예외적으로 따뜻한 빛이다. 끔찍한 임무를 마친 용대는 해방감에 들떠 태숙에게 공중전화를 건다. 떠들어대는 용대의 시야에, 한때 그를 존경한다 말했던 어린 조직원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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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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