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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29 18:11 수정 : 2007.08.29 18:11

<질투는 나의 힘>(2003)

[매거진 Esc]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질투는 나의 힘>(2003)

한윤식(문성근)은 관록 있는 문학지 편집장이다. 이원상(박해일)은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이력서와 논문을 번갈아 시큰둥하게 끄적거리고 있는 청년이다. 어느 날 그의 여자친구 노내경이 유부남 한윤식을 사랑하게 됐다며 이별을 통보한다. 자취방을 걸레질하며 분을 삭이던 청년은, 한윤식의 잡지에 객원기자로 일할 기회가 오자 충동적으로 붙잡는다. 설상가상으로 이원상이 호감을 품은 동료 사진기자 박성연도 한윤식과 연애를 시작한 눈치다. 바야흐로 치정 복수극으로 치달을 법한 상황. 그러나 <질투는 나의 힘>이 관찰하는 진실은 미지근하다. 다만, 그것이 밟는 행로가 놀랍다.

영화에서 이원상과 한윤식은 각기 세 여인과 관계를 맺는데 그 교집합인 두 여자-노내경과 박성연-는 배우 배종옥이 1인2역으로 연기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한 여자인 동시에 세상의 모든 여자다. 영화는 원상의 강박이 한 여자에게 얽힌 마음이 아니라, 능란하게 나이 먹은 중년 남자가 소유한 모든 것을 향한 선망이라는 점을 서서히 드러낸다. 한윤식은 능란하게 나이 먹은 중년 남자다. 그는 적당한 권위와 적당한 반권위주의, 명쾌한 언변과 약간의 어리광을 절묘하게 구사하며, 원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얻어낸다. 그가 인생과 벌이는 거래는,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미세하게 불공정하다. 이 사내가 콧노래를 부르면 세상은 흔쾌히 코러스를 넣어 준다. 이원상은 급격히 매혹당한다. 질투는 무기력한 그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그에게 필요한 존재는 애초에 연인이 아니라 우상이었다. 사랑을 얻는 법 따위는 우상이 가르쳐 주리라!

급기야, 회의석상에서 “편집장님은 원상이만 예뻐한다”는 동료의 불평에 이원상은 발그레한 미소를 짓기에 이른다. 포식자다운 예민한 후각으로 한윤식은 완전한 항복을 접수한다. “귀여운 데가 있는 새끼”라고 흐뭇하게 품평한다. “내게 이래라저래라 말해 준 사람은 편집장님이 처음”이라고 고백하는 청년의 눈동자는 감격으로 빛나고, 거기 화답하는 중년의 미소는 훈훈하기 그지없다. 이제 이원상은 거의 한윤식에게 ‘입양’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즈음 한윤식이 장인상을 당하자 이원상은 조의금 접수대를 착실히 지킨다. 조문객으로 찾아온 박성연에게 그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두 남자는 한윤식의 거실에 나란히 눕는다. 자발적 존경과 후원의 거래는 신뢰 아래 승인되었다. 한윤식은 이원상의 손을 슬쩍 잡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무장을 해제한 두 남자는 더없이 흡족하고 평온해 보인다. 여자들은 원경으로 사라지고, 이원상은 짐을 꾸려 한윤식의 집으로 입주한다. 이원상은 한윤식의 어린 딸에게 잘 지내자는 인사를 건넨다. 소녀는 화목하게 둘러앉은 부모와 청년을 불길한 눈길로 바라본다.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은 여기서 다시 탄식한다. 미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부러움만으로 바퀴를 굴려 가는 군색한 청춘에 대하여.


<씨네21>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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