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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내내 접이식 자전거를 들고 다녔다. 독일 카셀에서도 배낭을 매고 도시를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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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반이정의 유럽 미술여행 하
거대한 관람 감옥에서 시감각 혹사당할 땐 음악으로 해독을
직접 감상의 한시성만 제하면 명화 감상 자체에는 별 탈이 없는 걸까? 세계 최소형 국가, 바티칸 시국의 명소 바티칸 박물관은 감옥처럼 높다란 담벼락이 둘러싸고 있다. 그 주변으로 빽빽한 인파가 그 높다란 벽을 방호하듯 두르고 서 있다. 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입장을 기다리는 방문객으로, 기나긴 티켓 줄을 형성한다. 이들은 입장을 기다리며 몇 시간째 땡볕 아래 서 있다. 이 상시적 진경은 현지인에게는 어쩌면 화제조차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무관심 여부와 상관없이 외지인들의 기나긴 방문 줄은 바티칸을 먹여살리는 진정한 밥줄이다. 바티칸의 생계는 신의 가호나 교황의 은총이 아닌, 외지인의 호주머니가 보장하니까.
종교 스펙터클, 예배를 강요하는가
이 거대한 성지에 들어서는 순간 입장료는 아깝지 않다. 하지만 방대한 소장품 수는 우리들의 판단력을 정지시킨다. 어떤 핵심이 망각되는 순간도 이 무렵이다. 이는 바티칸 박물관뿐 아니라,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이들은 산마르코 광장 노천카페의 진부한 레퍼토리나 노변에 널린 싸구려 그림과는 비교될 수 없는 작품 목록을 자랑하므로 수준은 보장된 편이지만, 이 방대한 작품이 하나같이 후원자의 의뢰로 제작되었고, 그림의 주제 역시 통계적으로 종교화나 권력자의 생애 일색으로 채워졌다는 점은 어딘가 감상 내내 석연치 않은 기분에 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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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츠부르크의 보행자와 자전거가 함께 그려진 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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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성화와 역사화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주제 편중이다. 그 백미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인테리어를 가득 채운 <최후의 만찬>과 <천지창조>다. 이 대형 종교 스펙터클은 권력의 정점에 있던 고위 성직자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우군이 되었을까, 반면 다수의 무지몽매한 군중에게 얼마나 중대한 시각적 압박이었을까? <최후의 심판>을 통해 천국과 지옥이라는 단순한 선악 이분법을 강요하는 종교 스펙터클의 문법은 당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윤리적 지침이었을까?
시스티나 예배당의 작품들은 유럽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예우를 받는다. 유럽 대다수 전시장은 사진 촬영이 허용되는 반면, 이곳에서는 소음과 사진 촬영이 일체 금지된다. 그것은 관람자가 아닌 예배자를 다스리는 규칙에 가깝다. 종교를 초월한 불특정 관객들에게 500년 전 예배 의식이 적용되는 경우랄까. 그곳에서는 ‘감상’과 ‘예배’가 미세하게 혼재되어 있다. 관객들은 거대한 관람공장을 통과하면서 지적 사행심을 충족받는 대가로 절대 불변의 종교적 숭고미 아래 놓인 나약한 순례자가 된다.
유럽 어느 전시장에서건, 관객의 모습은 진중한 감상자보다는, 길 잃고 서성대는 방황자의 얼굴을 닮아 있다. 미술에 대한 각별한 식견 없이 500년보다 더 오래된 작품을 대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리다. 하지만 방황의 더 결정적인 요인은 방대한 관람 분량 때문이다. 누가 계산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루브르의 소장품을 전부 보려면 점당 30초를 배당해도 일주일이 소요된다는 결과를 내놨다. 자랑과 으름장이 뒤섞여 있다. 그렇지 않아도 우중충한 전시장에 투입된 관객은 마치 거대한 감옥에 갇혀 소장 중인 작품 전부를 암기해야만 출구를 내준다는 난제에 부닥친 양, 분주히 전시장과 소장품 사이를 옮겨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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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프로이트 박물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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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의 베네치아의 21세기 리얼리즘
유럽 여행 중 내게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가 몰려온 것도 지나치게 많은 전시장을 방문하던 무렵이다. 여독의 원인을 오랜 외유 탓으로 돌리기엔 어쩐지 부족했다. 여행자의 보람이 대개 시감각의 혹사 정도와 비례한다고 믿어지는 풍토 때문에, 여행 중 우리는 지나치게 시감각에만 편중된 생활을 장기간 방치한다. 미숙한 언어구사로 청각은 거의 무용지물이므로 유용한 모든 입력 정보는 눈이라는 창구로 일원화된다. 많이 보는 것을 투자 원금 보상으로 의심 없이 믿어버린다. 시각 정보의 과다 입력을 소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피로의 진정한 원인으로 감각 편중을 의심하게 된다. 엠피3 이어폰을 두 귀에 꽂자, 시감각에 쏠렸던 감각이 청각으로 안배되면서 균형점이 잡히는 느낌을 받았고 긴장도 풀렸다. 해외여행의 여독에는 음악이 해독제다.
베네치아(베니스)의 현지 시간은 15세기 르네상스에서 정지됐다. 그들은 사실주의 미학 과잉으로 요약되는 문화적 자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유일한 예외가 미술축제, 비엔날레일진대 세계에서 최장 최고를 자랑하는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리얼리즘 미학 그 자체를 대변하는 과거 도시 베네치아와 묘한 비대칭과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1999년 나토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군 본부 공터에서 숨이 차올라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공차기에 홀로 몰입하는 소년. 파올로 카네바리의 2007년 신작 <해골 차기>의 전모다. 아르세날레관에서 상영 중인 12분 분량의 이 영상 작품에서, 소년의 능수능란한 발 위로 튕겨지는 건 축구공이 아니라, 이미 누렇게 변색한 두개골이다. 관객은 그것을 폭격 직후 수습 못한 신원미상의 희생자 유골로 유추하게 될 것이다(실은 고무로 해골 주형을 뜬 거라고 전해진다).
변방에서 상시 발생하는 이 서늘한 리얼리즘의 충격은 21세기가 직면한 불편한 현실성을 기록한다. 베네치아 안에는 사실주의라는 동일한 테제를 상이하게 가공하고 길들이는 두 개의 양상이 공존한다. 베네치아 전역을 떠도는 15세기적 리얼리즘과는 색감, 성격, 취지 모두에서 상반된 비엔날레의 21세기적 리얼리즘. 도시 전체가 리얼리즘과 고전주의로 점철된 베네치아에서 격년 주기로 개최되는 이 실험예술의 격전은 도시의 노화를 일시 후퇴시키는 자정 장치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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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껴라.’ 52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구호는 이렇듯 근사하지만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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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탑승은 로맨스의 전면 포기?
비포 선라이즈 증후군. 뭔지 감 잡았을 게다. 동반자 없이 홀로 타지에 떨어진 이에게는 ‘비포 선라이즈 증후군’이라는, 못 말리는 병이 찾아온다. 오죽하면 여행 책자까지 빈(비엔나)의 필수 투어 코스로 <비포 선라이즈>의 남녀 주인공이 거닐던 로케이션들을 상세히 소개할까. 머나먼 이국에서 기왕이면 타 국적의 여행자와 로맨스에 빠지고픈, 소박하고 막연한 기대감까지 챙겨주는 편집진의 배려라니. 나 역시 비포 선라이즈 증후군에 관한 한 자유롭지 못했다. 출국 직전 여객기 폭파 상상을 견제할 가장 유력한 반대급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요행은 증후군의 진원지인 빈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파리, 뮌헨, 프랑크푸르트, 런던 그 어디에서도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6등신 체형의 30대 후반 동양계 남성은 현지에서 용인될 수 있는 하한선보다 더 밑바닥이었던 걸까? 이건 당시 나의 자격지심을 요약한 거고, 내 나름대로 분석한 실패 요인은 이렇다. 필시 개연 가능한 숱한 줄리 델피‘들’이 내 주변을 서성댔을 거라 차마 위로해보지만, 그들은 나와 언제나 일정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였다. 왜냐하면 내가 거쳐 간 모든 행선지를 통틀어 나의 동선은 여느 여행객들과 매우 상이했는데, 원인은 출국을 앞두고 열에 일곱은 짐 된다고 결사반대한 자전거 휴대에 있다. 여행 내내 접이식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자전거 탑승자와 보행자는 동선 및 속도 모두에서 판이한 양상을 그린다. 그런데 연애의 기초란 무엇인가? 동선과 보조를 일치시키는 데서 출발한다. 자전거 탑승은 이런 기본 전제의 전면 포기를 의미한다.
덕분에 내게 여행은 영화로 치면 <비포 선라이즈>보다 <자전거 도둑>이 늘 염두에 붙어 있었다. 자전거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는 자전거마다 육중한 시건장치를 달고 있었다. 자전거 도둑에서도 강국인 건가? 어쨌건 빈에서 줄리 델피 같은 미소녀와의 운명적 만남은 없었지만 덕분에 자전거와의 관계가 급진전(!)했다. ‘실제로 가 본 적조차 없는’ 이들마저 유럽을 자전거 타기 좋은 나라로 훈수를 두는 자전거 강국 유럽. 내가 가본 5개국 12개 도시 중 자전거 도로가 가장 합리적으로 정비된 곳은 단연 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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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방문자는 모두 ‘모나리자’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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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자전거 도로와 더불어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색다른 횡단보도 신호등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점멸 라이트 안에 자전거 탑승자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는데, 도구에 불과한 탈것 또는 자전거 탑승자를 일반 보행자와 동등하게 배려하는 행정 조처로 읽혔기 때문이다. 바이크 마니아라면 외지에서 자전거를 배려하는 이런 색다른 기호 하나에도 가슴 찌릿한 감동을 받아 마땅하다. 유럽의 진일보한 자전거 문화는 도심에서 벌어지는 심야 집단 라이딩, 차도를 따라 당당하고 느리게 일반 자동차와 함께 움직이는 라이더들을 보면서 체험된다. 한국의 교통문화의 견지에서는 차량의 진행을 방해하는 행태로 지탄 받을 터이니 말이다. 어쨌건 타지에서 자전거와의 밀착 동행으로 말미암아 실현 가능했을 로맨스가 멀찌감치 도망쳤으리라는 단정. 나는 그렇게 믿기로 혹은 위로하기로 했다.
‘비행기 추락’ 공포여 안녕
여정이란 역과 역 사이를 잇는 이동 경로들의 총합이다. 여행자는 그들이 경유할 역들의 위치와 타임테이블을 자신의 일정과 일치시키면서 여행의 밑그림을 짠다. 꽉 들어찬 일정을 고집하다가는 도착역 한 곳에서의 차질이 여행 전체에 누를 끼치는 예도 있다. 앞뒤 여유가 없는 시간 관리에 익숙한 내게 이번 여행은 그런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빡빡한 시간 채우기로 열차를 출발 1분 전에 허겁지겁 올라탄 피렌체행 열차가 그랬고, 하루 일정으로 떠난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관람 역시 예상에 없던 독일 열차 노동자의 새벽 파업과 예상 못한 우천으로 고작 반나절 만에 행사를 허겁지겁 관람하기도 했으며, 때론 파리행 침대칸 열차 안에서는 얘기로만 듣던 취침 중 도난을 난생처음 당해, 파리 일정 초반 내내 불쾌감을 토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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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물가가 비싸 짜증난 영국. 동전 속 인물이 죄다 여왕의 프로필이어서 더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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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덕분에 <비포 선라이즈>의 요행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자전거와의 관계가 급진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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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난 자체에 대한 불쾌감과 함께, 여정 막바지에 긴장을 풀어버린 나에 대해 용서가 되지 않은 탓이다. 돌이켜보면 서울에서 간혹 외국인이 내가 베푼 대단치 않은 호의에 과도한 감사 인사를 하는 걸 접할 때마다 얘들은 원래 표현법이 호들갑스러운가 보다 했는데, 외지에서 등에는 큰 배낭을, 한 손에는 지도를, 다른 한 손에는 10㎏짜리 접이식 자전거를 든 30대 후반 여행 초심 동양 남성인 나 역시 그들과 흡사한 제스처와 절박한 표정으로 현지인의 호의에 답하고 있었다.
나로선 첫 체험의 패키지였던 이번 여행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따위의 철학적 주문, 선진 유럽 문화에 대한 입에 발린 찬사, 미술사의 걸작 감상 등 항간에 나도는 해외여행을 둘러싼 기대치와 찬사들에 균형추를 달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부인할 수 없는 가장 구체적인 수확이 있으니, 출국 전 나의 과도한 상상력이 만든 비행기 추락에 대한 공포감 역시, 공항 출국 검색대를 통과할 다음번 여행에서는 함께 담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글·사진 반이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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