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0.03 17:22
수정 : 2007.10.0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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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고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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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와인의 고향을 가다
요즘 우리나라는 와인이 유행이다. 하지만 그 정체를 알 도리가 없다. 알 수가 없으니 불편하다. 같은 이름의 와인이라도 때에 따라 달라지는 맛과 복잡한 이름도 한몫을 한다. 삼성경제연구소의 2007년 4월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이오(CEO)와 임원의 84%가 와인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과연 와인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기껏 술일진대 공부하고 외우고 낯선 것을 품으면서 마실 필요가 있을까! 그저 술은 술일 뿐이지 않을까!
내게도 언제부터인가 빨갛고 향긋한 술, 와인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때로는 걸쭉하게 때로는 향긋하게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고민이 생겼다. 이름을 외워야 할까? 매일 테이스팅하고 노트에 꼼꼼히 기록해야 할까? 그 정체를 알아보고 싶었다.
간절히 염원하는 일은 우주가 도와준다고 했던가?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를 갈 기회가 생겼다. 프랑스 보르도와 이탈리아 시칠리아 부속 섬 판텔렐리아.
보르도는 김중혁 객원기자가 다녀왔다. 그가 다녀온 보르도에는 100년 동안 변하지 않는 등급이 있다. 그 등급에 따라 좋은 와인이다, 아니다, 말들은 많지만 일등급 와인 그랑 크뤼보다 낮은 크뤼 부르조아 와인이 더 맛있고 비싼 것도 있단다. 더 이상 등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도밭이란다. 보르도 와인을 만드는 포도밭은 넓지만 척박했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임을 알았다.
판텔넬리아 섬에는 보르도보다 거창하고 화려한 포도밭은 없었다. 작은 밭에 서너 명의 일꾼들이 포도를 따고 골랐다. 그렇게 고른 포도들은 지중해 바람과 뜨거운 태양아래 건조되고 와인이 되었다. 시칠리아 대표 양조장 돈나푸가타의 기막힌 와인 이야기도 들었다.
그 두 곳은 결코 거창하지 않았다. 와인은 그저 포도로 만든 술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저 마음 편한 친구로 여기고 함께 즐기면 되는 것이다.
시칠리아 판텔렐리아(이탈리아)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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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포도밭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경사도다. 샤토마고의 포도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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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메독의 땅에서 확인하는 ‘신이 빚어낸 보르도 와인’의 매력
프랑스 보르도에는 ‘알리앙스’(l’alliance; www.crus-bourgeois.com)라는 협회가 있다. 메독 지역의 ‘크뤼 부르주아’등급의 와인을 홍보하고 관리하는 단체다. 알리앙스의 프레데릭 대표는 ‘알리앙스’라는 로고를 이렇게 해석했다.
“단어에 ‘엘’이 세 개 있죠? 맨앞 제일 길쭉한 엘이 메독의 그랑 크뤼 와인을 의미해요. 두 번째 엘은 크뤼 부르주아를 의미하고, 마지막 엘은 크뤼 ‘아르티잔’(Artisan)이나 그 밖의 와인을 뜻해요.”
포도 너머 포도, 코와 발의 마비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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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뒤크뤼 보카유의 오크통. 스테인리스 스틸 마개가 눈에 띈다.(맨위사진) 와인 저장고의 와인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인다.(두번째사진) 와인즙이 되기 전의 포도알들.(세번째사진) 포도넝쿨의 생명력은 볼수록 신비롭다.(맨아래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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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중에 나온 이야기라 실제로 그런 뜻을 담고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은 그럴듯했다. 게다가 알리앙스는 ‘화합’이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 메독 지역의 최고 등급인 그랑 크뤼, 그랑 크뤼를 보완하고자 생긴 크뤼 부르주아,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와인들이 모두 화합하여 사이좋게 어울린다는 뜻인 모양이다. 보르도는 수많은 와인 조각으로 만들어진 퍼즐 같은 곳이다.
와인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보르도와 메독이라는 지방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만큼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다. 프레데릭의 말처럼 그랑 크뤼, 크뤼 부르주아, 그리고 수많은 와인들이 메독의 상징 같은 것이 돼 버렸다.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메독은 일종의 ‘성지’와 같다. 프랑스 와인은 보르도 스타일과 부르고뉴 스타일로 나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보르도가 더 대중적이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부르고뉴 와인보다 가격도 쌀 뿐더러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스타일이 보르도 와인이기 때문이다.
메독 지방으로 처음 들어서면 눈이 마비된다.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과 포도밭뿐이기 때문이다. 산 너머 산이 아니라 포도 너머 포도다. 그 다음으로 코가 마비된다. 모든 곳에 포도향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발이 마비된다. 너무 많은 양조장(샤토)이 있어서 어디부터 가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보르도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다.
앞서 얘기했듯 보르도 메독에는 그랑 크뤼라는 등급이 있다. 다섯으로 나뉘어진 이 등급의 역사는 꽤 오래 됐다. 1855년에 만들어졌다. 150년도 넘었다. 그런데 만들어진 이후 (몇 가지 작은 수정 이외에는) 아직까지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쉽게 이해할 수 없다. 100년 넘게 와인의 우열이 고정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등급은 계속 1등급이고, 5등급은 늘 5등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랑 크뤼의 독주를 보완하고자) 크뤼 부르주아라는 등급이 생겼지만 여전히 그랑 크뤼라는 이름은 신성에 가깝다. 보르도의 한 와인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랑 크뤼의 칭호를 붙이는 기준은 와인의 품질뿐이 아닙니다. 샤토의 전통, 양조 방식, 와인을 만드는 태도 같은 것들이 모두 포함돼 있는 것이죠. 그리고 크뤼 부르주아 등급의 양조장들이 그랑 크뤼를 부러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각의 위치가 있는 거죠.”
실제로 그랑 크뤼의 등급, 크뤼 부르주아의 등급이 가격이나 품질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3등급이 1등급보다 비싸거나 크뤼 부르주아가 그랑 크뤼보다 비싼 예가 허다하다. 크뤼 부르주아 엑셉시오넬 중 하나인 샤토 샤스스플린에 들렀을 때 장 피에르 푸베는 1986년 산을 내놓으며 그 어느 그랑 크뤼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고, 실제로 맛도 그랬다. 등급은 의미 없다.
‘어젯밤 보르도의 몇 등급 와인을 마셨다’는 말은 자랑이 아니다. 더는 자랑일 수 없다. 이제 우리나라도 와인을 허장성세의 명찰이 아닌 식사의 친구로 인식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크뤼 부르주아 와인은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샤토 푸조나 샤토 루덴 같은 와인은 가격 대비 품질이 아주 좋은 크뤼 부르주아 와인들이었다. 한국에 들어오면 가격이 높아지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인 와인들이다.
메독 지방의 포도밭에 들렀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땅이었다. 메독의 땅은 척박하다. 어딜 가나 돌무더기다. 자갈과 모래투성이다. 과연 이런 곳에서 포도가 자랄 수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땅에서 보르도 와인의 매력이 생겨난다. 힘든 환경 속에서 험하게 자라난 아이들이 보여주는 생명력이야말로 보르도 와인의 매력이다. 테루아(Terroir)라는 단어의 정의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샤토 라그랑제의 와인메이커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와인은 포도밭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절대 좋은 시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평가를 잊고 와인 속의 과일을 찾아내랴
이 말 속에 프랑스 와인의 핵심이 담겼다. 많은 나라에서 보르도 와인을 흉내내지만 여전히 보르도의 와인이 특별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건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다. 그 축복을 보르도는 잘 간직하고 있으며, 정성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여러 포도밭을 돌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장 귓가에 남는 것은 샤토 뒤크레 보카유의 와인메이커가 했던 말이다.
“사람들은 와인을 마실 때 그 속에서 오크향을 찾아냅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오크향을 찾아내고 싶다면 숲 속으로 들어가서 나무 껍질을 씹어 먹는 게 낫죠. 와인을 마실 때는 그 속에서 과일을 찾아내십시오. 와인은 과일로 만든 술입니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와인은 별게 아니다. 와인은 포도로 만든 술이다. 와인을 마실 때는 등급을 잊고, 이론을 잊고, 평가를 잊고, 그 속에서 과일의 향과 수많은 맛을 찾아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기분 좋게 취하면 된다.
보르도 메독(프랑스)= 글 김중혁 객원기자
vonnegut@nate.com·사진 김중혁 객원기자·Philippe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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