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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03 18:50 수정 : 2007.10.05 15:24

시칠리아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포도 따는 시기를 놓치면 지나치게 단 와인이 만들어진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지중해 시칠리아섬의 대표 와인너리 ‘돈나푸가타’에서 좌절 끝의 기쁨을 얻다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담은 사진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프랑스나 이탈리아 포도밭의 사진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넓은 구릉지대와 길게 뻗은 길, 그 사이로 주렁주렁 달린 포도들, 절로 침이 고인다. 이탈리아 와인너리(와인 양조장)을 방문하는 비행기 안에서 잔뜩 그런 사진을 생각하면서 드디어 나도 내 인생에서 그 한 장을 남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인천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11시간40분, 다시 그곳에서 로마까지 두 시간, 시칠리아 섬까지 한 시간, 그 부속 섬 판텔렐리아까지 오십분, 비행기를 놓쳐 노숙까지 한 여정이었지만 곧 사탕선물을 받을 아이처럼 힘들지 않았다.

화이트 와인 ‘벤 리에’를 아시나요?

빗물을 받을 수 있는 지붕(맨위사진). 뜨거운 태양과 지중해 바람이 포도를 탐스럽게 키운다(가운데사진). 녹색의 포도껍질이 자연건조되어 색이 변했다(맨아래사진).
지난달 7일, 구름 그림자와 지중해의 산뜻한 바람이 반겨주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부속 섬 판텔렐리아에 도착했다. 와인 양조장 돈나푸가타의 주인 자코모 랄로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곧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곳에는 구릉도 없었고 한 폭의 수채화도 없었다. 그저 돌과 바람과 색이 변한 포도이파리들뿐이었다.

주인장 자코모는 한껏 설명을 한다. “돈나푸가타란 이름은 ‘도망 온 여자’란 뜻입니다. 19세기 나폴리에서 시칠리아 섬으로 이주한 왕녀 마리아 카롤리나의 이야기지요. 그를 가리키는 것이죠.” 자코모 랄로가 친절히 알려준다. 이야기는 계속되었지만 짧은 시간 겪은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돈나푸카타는 자코모와 그의 아내 가브리엘라, 그들의 자녀 조제와 안토니오가 운영하는 가족 양조장이다.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와인너리다.

최근 몇 해 동안 이탈리아 와인은 요리의 인기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그 인기가 주춤하는 지금 독특한 향기를 가진 시칠리아 와인이 그 기운을 이어가고 있다. 시칠리아 섬은 전체 이탈리아 와인 생산의 13%를 차지하고 있고, 매년 그 양도 늘어나고 있다. 그 중심에 와인너리 돈나푸가타가 있었다.


돈나푸가타는 이탈리아 토착 포도 품종인 네로 다볼라(Nero d'Avola)와 지비보(Zibibbo)를 주된 재료로 와인을 만들고, 시칠리아와 부속 섬 판텔렐리아에도 포도밭을 두고 있다.

판텔렐리아는 화산섬이다. 물이 귀하다. 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두고자 조개껍질 모양의 지붕들을 만들었단다.

안토니오 랄로는 “따뜻하고 겨울과 바닷바람이 있어 포도를 말리기에 좋다. 이곳에서 화이트 와인 벤 리에(Ben Rye)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방문 둘쨋날 바로 그 벤 리에의 제조과정을 볼 수 있었다.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몇 번이고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넓은 포도밭이 있지요?” 답은 “예스!” 두고 볼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랄로의 가족들은 서둘렀다. 도로가 좁아 큰 차라고는 볼 수 없는 섬에서 마치 딱정벌레 같은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달렸다. 간간히 차창 밖으로 내미는 얼굴과 팔은 이미 익을 대로 익은 토마토로 변해 있었다.

차가 멈춘 곳은 크지도 넓지도 않은 비닐하우스 몇 채와 마당이 있는 곳이었다. 비닐하우스에는 녹색의 모스카토 포도가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와인을 만드는 방법중에 하나인 파시토(Passito)를 보실겁니다. 시칠리아 섬에서만 만드는 방식은 아니지만 벤 리에를 이 방식으로 만들지요. 포도를 약 3~4주 동안 말립니다. 이미 스테인리스 통에서 발효시키고 있는 와인에 이것을 넣어 함께 익힙니다.”

시칠리아 농부들의 굵은 손마디는 우리네 농부의 그것과 같다.
안토니오, 미워 미워 미워!

도로에 이는 돌바람을 뒤로 하고 포도를 수확하는 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울퉁불퉁 큰 팔뚝을 자랑하는 농부들은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포도송이를 가위로 자르고 있었다. 우리 논밭에서 벼농사를 짓는 농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곳 역시 내 사진기에 들어갈 큰 포도밭은 없었다. 안토니오가 한없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농부의 땀방울과 사진기를 든 나의 땀이 합쳐지면서 조금씩 기쁨이 피어올랐다. 이제는 모든 게 설레기까지 했다.

밤에는 벤 리에를 맛보는 시음회가 열렸다. 낮에 본 그 풍경들을 맛본다니 감격스러웠다.

빈티지가 다른 여섯 가지 와인은 그 맛이 약간씩 달랐지만 황금빛의 달착지근한 맛은 공통적으로 인상적이었다.

돈나푸가타는 해마다 재미있는 와인투어를 벌인다. 19세기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돈나푸가타의 마르살라 양조장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판텔렐리아섬의 지중해 여행과 와인 시음 행사 등을 준비한다. 신청은 인터넷으로 받는다.

인생은 흔히 기대와 욕망을 절망과 좌절로 되돌려 주기도 한다. 하지만 찬찬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딘가에 반드시 희망과 기쁨이 있다. 내가 만난 판텔렐리아의 돈나푸가타 역시 그랬다. 무지에서 온 기대는 절망으로 변했지만 안토니오와 농부들은 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땀 흘려 키운 포도를 자식처럼 쓰다듬으면서 맛난 와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울에 돌아온 내 손안에는 그들을 담은 뿌듯한 사진들이 남았다.

시칠리아 판텔렐리아(이탈리아)=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찰랑찰랑 와인잔 안에 판텔렐리아 바다가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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