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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11 15:37 수정 : 2007.10.11 15:48

임피역 플랫폼 주변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다. 은행나무와 어울려 정원이 된다.

[매거진 Esc]
은행나무와 소파가 어울린 임피역의 정취, 개발의 세파에 사라질 운명을 예감하다

전라북도 군산 땅 술산리에 임피역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익산역과 군산역 사이 간이역. 전주~군산 4차선 산업도로가 에둘러 지나쳐 군산 사람들도 잘 모르는 곳. 임피역은 호남평야의 금강 언저리, 임옥평야(임피·옥구평야)의 지평선보다 낮게 숨어 있습니다.

원형 잘 보존된 1930년대 건축 문화재

완행열차 ‘비둘기호’를 대신하고 있는 군산선 통근열차는 올해를 끝으로 사라진다.
임피역이 가끔 이름을 타는 까닭은 임피역사의 녹록지 않은 관록 때문입니다. 임피역사는 1936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70년 가까운 역사가 서려 있지요. 한국철도의 ‘문화재 등록역 현황’을 보면, 임피역은 “당시 농촌지역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 건축형식과 기법을 잘 보여주며, 원형 또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임피역사는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한 절충주의적 양식을 띠고 있다고 하는군요. 등록문화재 208호입니다.

해가 순해질 무렵, 임피역에 닿았습니다. 듣던 대로 역 앞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홍살문처럼 서 있었습니다. 은행나무 사이로 펼침막이 걸려 있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동군산농협 당선자 아무개.’ 아무개씨는 임피 사람인가 봅니다. 은행나무 옆 또 하나의 펼침막 문구는 이랬습니다. ‘임피 출신 아무개의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은행나무 문, 아니 펼침막 문을 통과해 역사로 들어가니, 자전거 석 대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매표창구는 문을 닫았습니다. 역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건 군산선 통근열차 시각표와 주민이 걸어 놓았다는 시계뿐. 술산리 주민들의 아쉬움 속에서 임피역은 지난해 11월 무인역으로 바뀌었습니다. 임피역에서 기차를 타면 기차 안에서 기차표를 끊어줍니다.

개찰구를 통과하니, 플랫폼은 말 그대로 정원입니다. 또 하나의 은행나무 한 쌍이 철길 가는 길목에 다정히 서 있고, 그 아래로 주민들이 가져다 놓은 소파 넷와 긴 나무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동네 아저씨들이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한 아저씨가 “사람들이 은행을 다 따 가버려, 남은 게 없다”고 말합니다. “은행나무는 원래 암수를 함께 심어야 열매가 많다”는 말대로 오른쪽 암나무에만 열매가 달려 있습니다. 주민들은 비가 오고 난 뒤 새벽이면 임피역에 와서 은행을 주워간다고 합니다.


아저씨가 다녀가고 통근열차 서너 대가 지나갑니다. 두어 사람이 타고 두엇이 내립니다. 이번엔 동네 꼬마들이 자전거를 타고 역 안에 들어옵니다. 은행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워두고 플랫폼 끝에서 소꿉장난을 합니다. 화물열차가 느림보처럼 지나가고 늙은 햇살을 맞은 코스모스가 하늘거립니다.

임피역에 어둠이 찾아옵니다. 10여㎞ 떨어진 익산역에서 불을 켜자, 플랫폼이 빨갛게 물이 듭니다. 한 아주머니가 플랫폼을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45년 전 익산에서 시집 온 한순자씨가 저녁 운동을 하는 모습입니다.

통근열차는 ‘교통 약자’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로 이용한다.
꼬마들은 소꿉장난, 아줌마들은 저녁 운동

“그랑께 이 임피역사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것이요. 오늘 낮에 대야역에 나가서 들었는디, 곧 통근열차가 안 다닝단께요. 그 소리를 들으면 여그 임피 사람들은 땅이 꺼져요. 데모라도 해야 하는디, 마을에 사는 게 다 늙은이인지라 …!”

통근열차는 내년 1월이면 사라집니다. 금강철교 개통으로 군산선이 장항선에 연결돼,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군산선에 다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다니는 곳에선 통근열차를 점진적으로 폐쇄한다는 게 한국철도의 방침입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입니다. 한국철도에 문의해 보니, 여객사업본부의 함성훈 차장은 “군산선 통근열차는 운행을 중지하고, 무궁화호만 출퇴근 시간대에 임피역에 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술산리 사람들에게 통근열차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통근열차가 군산역 새벽시장에 타고 나가는 교통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들은 경로 우대요금 700원만 내면 되기에, 시장에서 단돈 1만원어치만 팔아도 후회가 없습니다.

이튿날 아침 6시36분, 임피역 플랫폼은 열 분이 넘는 할머니들로 북적입니다. 할머니들 대부분은 새벽시장에 물건을 팔러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호박과 나물, 그리고 임피역 은행나무에서 따온 은행 몇 주먹이 보입니다. 양은 적지만 품목은 다양합니다.

군산역까지는 단 18분입니다. 6시54분 군산역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들은 100m 달리기라도 하는듯 밀차를 밀고 역 광장으로 내달립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트럭을 타고 온 ‘기업형 좌판’들로 좋은 길목은 이미 자리가 잡혔습니다. 임피의 ‘지각생’ 할머니들은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채소를 팝니다.

군산역 새벽시장은 아침에만 열리는 시장입니다. 갑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져 ‘도깨비 시장’이라고도 불리지요. 아침 8시가 되어가니 단속반원이 돌면서 “5분 남았어요. 빨리 장사 끝내세요”라고 소리치고 다닙니다. 어떤 단속반원은 함께 짐을 싸면서 재촉합니다. 도깨비 시장이 사라지는 풍경입니다.

1936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임피역사.
통근열차 사라지면 도깨비 할머니들은 …

임피에서 온 ‘도깨비 할머니’들도 짐을 쌉니다. 음식점 주인에게 한 번에 팔아버리는 ‘횡재’를 만난 할머니는 7시30분 기차를 타고 돌아가지만, 대부분은 이런 행운이 따르지 않아 9시 기차를 타고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내년이면 이런 쏠쏠한 아침 장사도 못하게 될지 모릅니다. 통근열차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임피역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기차가 지나다닐 겁니다. 언젠가는 케이티엑스(KTX)가 지나갈 지도 모르죠. 하지만 대부분의 기차는 지나가기만 하고, 임피역에 서는 열차는 적어질 겁니다. 임피역 정원에서 쉬는 사람들도 굉음을 내며 통과하는 기차에 쫓겨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요.

군산=글·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임피역 지도

임피역 여행쪽지

군산·전주서 하루 8차례 출발

◎단 한 시간이라도 임피역 ‘정원’ 에 앉아 보라. 얼마나 술산리 사람들이 이 역을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 주민들은 역무원이 떠난 대합실 벽에 시계를 걸어놓고, 빗자루를 들고 나와 청소한다. 임피역은 역이라기보다는 주민들의 휴식처이자 광장이다.

◎임피역을 제외하곤 술산리에서 할 거리는 그리 많지 않다. 대신 술산리에서 호원대학교까지 한적한 시골마을 길을 거니는 맛이 있다. 영화 배경으로 나오는 1960~70년대 세트장 같은 분위기. 호원대까지 1㎞ 남짓. 걸어서 20분이다. 호원대 주변에 대학촌이 형성돼 있다. 다양한 음식점과 숙박시설이 있다.

임피역에 가려면, 통근열차가 최고의 교통수단이다. 하루 8차례 전주역에서 출발해 익산역을 거쳐 임피역에 닿는다. 이 중 한 차례는 익산역 출발. 어른 1400원. 마찬가지로 군산에서도 하루 8차례 출발한다. 한국철도 홈페이지(korail.com)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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