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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다스의 개>(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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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플란다스의 개>(2000)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주소가 분명하다. 그는 한강을 파리의 센강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대신 오직 한강에서만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실화에 기원한 <살인의 추억> 역시 1980년대 경기도 화성의 시공간과 떼놓을 수 없는 영화다. 갈아엎고 급조되기 일쑤인 한국의 공간에 감도는 모종의 ‘수상쩍음’이야말로 그를 간지럼 태우는 최초의 자극일지도 모른다. 감독의 첫 장편 <플란다스의 개>도 서울 아파트 단지를 거닐며 구상했을 법한 활극이다. 준공한 지 11년 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윤주(이성재)는 국문과 교수가 되려 하지만 연줄을 트지 못해 초조하다. 아내(김호정)에게 생계를 기대고 낮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는 그를 미치게 하는 것은, 이웃집 강아지의 소음. 울컥한 윤주는 강아지를 납치해 아파트 지하실에 버려진 장롱에 감금한다. 이렇게 시작된 개를 둘러싼 모험은, 아파트에 숨겨진 이면 공간과 도시 생활의 가려진 현실을 드러낸다. 정체 모를 파이프들이 구렁이처럼 벽을 달리고 주민들이 슬그머니 내다버린 잡동사니가 맥락 없이 섞여 쌓여 있는 지하실은 낯설다 못해 기괴하다. 강아지를 보러 갔던 윤주는, 경비원 변씨(변희봉)와 관리인이 보신탕을 끓이며 나누는 대화를 듣는다. “지하실 전체가 ‘이잉’ 하는 소리 안 들리오?”라고 서두를 뗀 변씨는 전설을 들려준다. 88년 올림픽 날림 공사 바람 속에 지어진 이 아파트의 입주 초기, 고장 잦은 보일러 수리를 위해 초빙된 장인 ‘보일라 김씨’가 현장소장과 시공업자의 비리를 꿰뚫어보고 호통을 쳤다가 몸싸움 끝에 죽었다는 것. 시체를 벽에 넣고 발랐는데 이후로 밤만 되면 보일러가 전라도 억양으로 운다는 것. 괴담을 구성지게 읊는 변씨의 얼굴 뒤로 겹겹이 늘어선 지하실의 벽들은 음험한 비밀을 감춘 회색 커튼처럼 보인다. 그 이미지는 아득한 소실점을 향해 도열한 <괴물>의 교각과도 유사하다. 아파트는 공동 주택이지만, 모여 살아야 할 이유나 인연이 없는 이들의 집단주거지이기에 지극히 잘게 분열되고 차단된 공간이다. <플란다스의 개>는 누구 소유도 아니기 때문에 방치된 ‘공용면적’의 온갖 용도변경을 보여준다. 옥상에서는 할머니가 무말랭이를 널고, 노숙자는 옥탑과 지하실을 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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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영화를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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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를 멈추다’를 이번 호로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김혜리 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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