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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이 몰려들었지만 함피는 쉽게 세속화되지 않았다. 폭염도 그대로였다. 유성용 〈여행생활자〉 저자 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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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나의 도시이야기 여행작가 유성용의 함피
남인도 함피는 도시라고 할 수도 없는 세상 변두리의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몇 백년 전까지만 해도 힌두 제국의 가장 번성한 고대도시 중 하나였다. 함피는 황금 바위 사막이라 이를 만하다. 풀 한 포기 없이 거대한 규모의 돌덩이들이 아주 비현실적인 풍경을 끝도 없이 펼쳐 보인다. 그곳은 기묘한 신성을 지녔다. 많은 호사가들이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 말하며 생활의 신성을 말하지만, 신이 거하는 장소들은 하나같이 생활의 냄새가 없다. 아주 단순한 이치지만 생활이 없어서 그곳은 신성한 것이다.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왕국 키슈킨다의 중심지가 이즈음 어디다. 황금바위 사막 여기저기 거대한 규모의 석재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아들고부터 불모지인 이곳에 몇몇 이주민들이 정착하고 여행자 편의시설이 들어섰지만 함피는 쉽게 세속화되지 않았다. 남인도의 폭염은 살아 있는 것들을 모두 태워버릴 듯하다. 나는 이곳에서 열병에 걸렸다. 상징이 아니고 말 그대로 고열로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열병이었다. 처음에는 몸살감기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걷다가 바위 그늘 아래 누우면 폭염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대신 내 속의 열기가 자꾸만 나를 몽유 속으로 몰아넣었다. 거대한 바위산을 오를 때에도, 혹은 고대 신전과 바자르의 유적을 걸을 때에도 이곳은 그 어느 것 하나 도대체 사람의 흔적 같지 않았다. 함피에서 머무는 날이 더할수록 고열 증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졌다. 낮에는 숙소에서 수백 개의 꿈속을 헤매었고, 해질 녘이면 간신히 몸을 일으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돌무더기 언덕 위에 올라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때에도 나는 온통 고열 속이었는데 정신이 수시로 아득해질 뿐, 좀처럼 그것이 고통인 줄도 잘 몰랐다. 해가 지면 매일매일 점점 커지는 달이 우주빛 하늘 위로 떠올랐다. 어느 날은 바나나 잎으로 엮어 만든 바구니 배를 타고 강 건너 하누만 템플에 올랐다. 황혼녘이 되자 바위들은 온통 붉게 물들고, 화성 같은 지형의 까마득한 꼭대기에 사원 하나가 하얗게 빛을 발했다. 그 풍경은 가히 우리의 상상 속에나 존재하다가 현실로 불쑥 솟아난 듯했다. 사원에서 신으로 모시는 원숭이들과 너무 늦게까지 앉아 있었다. 강가로 내려오니 아무도 없다. 다시 마을로 들어가 이미 잠들어버린 뱃사공을 깨워 간신히 바구니 배에 몸을 싣고 강 건너 숙소로 향했다. 강물은 달빛을 받아 온통 은물결로 반짝였고, 사방은 고요했다. 강가 여기저기에는 고대의 유적들이 신비하게 우뚝우뚝 솟아 검은 빛 아니면 은빛으로 빛났다. 그 밤은 아무래도 한창 번성하던 고대도시 함피의 그 어느 날만 같았다. 다음날 나는 콜카타(캘커타)까지 며칠을 달려야 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의사는 큰 병원으로 서둘러 가라고 했다.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고 해열제로도 열이 내리지 않았다. 기차에서도 나는 자꾸만 기절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낯선 누군가가 내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어주고 있었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차바퀴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나는 반의식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패망한 힌두 왕국의 수천 대 전차 구르는 소리를 들었다. 창밖으로는 거대한 규모의 시간들이 무서운 속도로 한 무더기씩 휙휙! 지나쳐 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사라진 도시를, 내가 이렇게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용 <여행생활자> 저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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