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로야구 원년 오비베어스의 우승을 이끈 박철순.
|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21이라는 숫자를 보고 들으면, 당연히 한 남자가 떠오른다. ‘불사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남자, 별명대로 모두가 끝이라 생각했을 때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남자, 내 생애 처음으로 ‘멋지다’는 형용사의 본질을 느끼게 해준 남자. 2007년 6월10일 잠실야구장. 노란 넥타이 위에 흰 유니폼을 걸쳐 입은 중년 남자가 마운드에 우뚝 서 있다. 등판에 ‘21’이라는 숫자가 선연하다. 한때 그는 무릎을 한껏 높이 치켜세우는 투구자세를 뽐냈다. 그 자세는 허리에 치명적이었지만, 그의 손을 떠난 공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빠르고 정확하게 포수의 글러브에 꽂히곤 했다. 이제 쉰이 넘은 남자가 망설이듯 숨을 고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얼굴이 바로 이런 찰나의 옆모습이었다는 것이 새삼 기억난다. 그 자리에 선 채 그는 22연승을 했고, 팀의 우승을 두 번 직접 겪었으며, 타자가 친 공을 정통으로 맞고 고꾸라졌다. 기립한 관중 앞에서 은퇴식을 하던 날,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은 그다운 일이었다. 그 남자가 평생 영욕의 장소였던 마운드에 다시 서서 공을 던진다. 공은 터무니없이 높은 곡선으로 공중을 붕 날아간다. 현재 두산베어스의 감독인, 1982년 그 남자와 배터리를 이루었던 포수가 가까스로 그것을 받아낸다. 두 사람은 베트남전 이래 처음 만난 옛 전우들처럼 조금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포옹한다. 남자의 이마는 어느새 훌떡 벗겨졌고 눈가엔 주름이 깊다. 이십오 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다. 만 열 살 때부터 나는 오비베어스의 충성스런 팬이‘었’다. 이 문장은 과거형으로 쓰여야 옳다. 오비베어스라는 구단 이름은 진작 사라졌고(두산베어스는 오비베어스가 아니므로!) 나는 언젠가부터 한국 프로야구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으니.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는 인천 소년들이 오비 팬들을 곰팅이라 부르며 질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꼴등을 응원하는 아이들의 눈에는 일등을 응원하는 아이들이 주류를 좇는 속물로 비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겠지. 한때 최강인 줄 굳건히 믿었던 ‘우리 팀’의 승패유전(勝敗流轉)을 오래 고스란히 지켜보아야 하는 기분을.
![]() |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
기사공유하기